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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3)제32화 골동품 비화40년(2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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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분원의 만가>
동란동안 군의로 있던 나는 휴전이 성립된뒤 잠시 여가를 얻어 오랜만에 요지를 돌아볼 수 있었다. 그것도 공무로 다망한 틈을 비집어 황황히 경남웅천과 경기도 광주군 일대의 요지를 다녀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촌토마저 남기지 않고 병화가 휩쓸어간 그 즈음에 누대의 도장애사가 서린 사기가마를 쳐다보니 수연한 생각을 금할 길이 없었다.
하늘을 가린 먼지를 뒤집어쓰며 논두렁사이와 밭이랑옆으로 누비는 비좁은 마차길을 따라 멀리 남북한강 합류점이 보이는 광주군 분원리에 당도했다. 언덕의 허리에 움푹팬 자국은 분명 지난날 사기가마의 자취가 분명하나 인연이 그친 불구덩이에서 옛날의 은성을 돌이키기에는 조금 막막한 생각이 없지 않았다.
한데 사기가마는 비단 분원리에만 널린게 아니라 한강으로 흘러드는 경안천양안의 도처에 널려 있었던 것이 그때 깨달은 소감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각지에 사옹관을 파견해서 감독한다는 구절과 분청계통의 사기가 광주군 일대의 요지에서 출토하는것을 보면 조선조 초기부터 활발히 구워낸 모양이다.
다만 양촌 권근이 계룡산의 기석리에가서 선왕의 묘지명을 만든 흔적이 있던 점으로보아 적어도 중국의 회회청이 수입되어 청화백자를 구워내는 세조 때까지 분원일대는 그리 대단치는 않은 것 같다. 지금도 경안(광주)읍에서 이천쪽으로 가다가 궁평리의 사기가마 자리가 그대로 있는데 궁궐(궁)에 항아리(평)를 구운 곳이라 해서 이러한 지명이 그대로 붙었으니 얼마나 대량으로 구워냈는가를 알 수 있다.
경안읍 뒤쪽에 왕자들이 낳은 다음에 태를 잘라서 매장하는 태봉이 있었던 것도 태를담는 항아리가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까닭이었다.
경안천 일대와 분원의 언저리는 더 말할 나위 없이 주운의 최적지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서울이 가깝고 그러한 교통조건 때문에 요지가 마음껏 늘어간 것이다.
조선조 중기의 항아리는 대개 도척면 궁평리에서 만들었다고 하나 차차 남종면 분원리와 금사리로 옮겨온다. 기록에 따르면 분원에서 쓰는 백토는 황해도 봉산군 도호부가 명을 받아 황해도수안군 조박리의 흙을 떠왔다한다. 그때의 실정으로는 참으로 대단한 노력이 드는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또 궁중에서 임금이나 종실의 권속이 쓰는 귀중한 그릇은 갑번이라 하는 특제 옹기에 넣어서 구운 모양이다.
임금은 순백 그러니까 너무 희다못 해 푸른 빛깔이 도는 옹기를 써야했기 때문에 갑번 속에들어가는 흙은 지극히 정제가 되어 곱고 흰 흙을 써야 한다. 그 흙이 얼마나 희든지 민간에서 흔히 『분원의 갑번보다도 희다』는 속담이 나돌 정도였다. 이렇게 해서 분원일대에서는 궁이나 사대부가에서 쓰는 일상용기는 물론 종묘서 쓰는 제기며 세도가의 묘지명마저 만들어야, 했으니 그 규모가 실로 방대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그릇을 굽는동안 아무리 기술이 뛰어난 도공이라도 다시 똑같은 기예로 훌륭한 작품을 만들수가 없었으니 그것은 고려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풍습으로 도장을 천민시했기 때문이다. 또하나 조선조에 들어오면서 부터 유교를 국시로 채택하게 되니까 이른바「완물상지」라고해서 속된 물건을 애완하면 고결한 뜻을 상하니 임금부터 이를 솔선해서, 금해야한다고 신하가 상소를 올리게 되었다.
그래서 백자는 「완물상지」의 뜻에 따라 일체의 수식을 제지하고 유교의 원리에 따르는 실용의 이기로만 만들어진 것이다.
분원의 도공은 5백년간 자연에 순응하여 천부의 자질만이 손끝을 움직이게 한 것이지 스승에게 배워서 연마한 기예로 빚은 것은 아니다. 일대의 걸출한 도장이 나왔다해도 그의 기술은 당대에서 스러지고 말뿐이었다. 「완물상지」를 미덕으로 아는 당대의 지배층은 정혼이 담기고 자연의 순리에 따른 지고의 아름다움을 직인의 천격스러운 잔재주로 여겼기 때문이다.
무명의 도공은 운명에 순응하며 시키는대로 사기가마곁에서 생애를마쳤으나 당세의 문장·화객이 분원에 화려한 발길을디디었다. 그래서 세가의 묘지명을 찬하고 쓴 일로 분원에서 이루어졌고 화원의 놀라운 솜씨도 분원의 백자위에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단원 김홍도도 분원을 수시로 드나들었음이 분명하다. 수원의 용주사에 있었던 기가 막힌 항아리인 청화백자진사연화문호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의 화필이 여러 개의 항아리나 백자병을 건드렸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용주사에 어떻게 단원의 물건이 가있었는가 하는 점에 의심이 없지 않으나 그가 그린 대웅전의 정화와 함께 정조가 그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극진히 생각했다는 점을 미루어 대강의 연관을 지을 수 있다.
조선조후기에 들어와 세도정치가 기세를 올리면서 관기가 소란해지는 것은 둘째치고 조정에서 관리하는 관요인 분원이 도가의 사설 사기가마가 되다시피 했다. 너나 할것 없이 권문세가는 자기네의 내방가사에 필요한 기혈을 분원에서 대량으로 마춰다 썼다.
제기·접시며 사발·대접이며 항아리며 할 것 없이 이렇게 멋대로 구워간 그릇이 굉장한 양이었던 증거는 우리집에 모아논 그릇의 발굽 안에 청화로 쓴 소유주 성씨를 보고도 알 수가 있다. 조선조가 쇠운에 기울어 드디어 일본과 합병하기까지의 어지러운 혼란상이 뒤범벅되는 동안 분원의 관리는 어떠했는지 모르겠다. 다만 「운현궁」이라고 접시 뒤에 새긴 글씨로 보아 대원군 집정당시에도 당당한 관요의 전통은 여전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일제 때 어느 골동수집가가 분원을 들렀다가 한 늙은 도공이 처량하게 앉아 녹로를 돌리고 있었는데 백자를 빚는 태토도 이미 황해도 조박리흙이 아니었을 뿐더러 청화는 일본의 구주에서 근대식 채굴법으로 대량생산되는 「코발트」였더라고 한다. 분원의 낙조는 이미 이 세기에 접어들면서 맞았던 것이지만 그때까지 순량한 조선조 직인의 수공예전통을 이은 도공의 후예는 아직도 그 자리를 지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갔을 때는 이미 인연의 흔적은 말끔히 걷히고 애꿎은 사금파리만 발부리에 채일 뿐이었다. <계속><제자 박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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