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바수술 이야기]18. Song's Creative Ring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 송명근 건국대병원 흉부외과 교수

나는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려왔다. 목표를 설정하고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하나씩 지워가듯이 살아왔다.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면 그 다음 목표와 체크리스트가 기다리고 있었고, 그 다음 목표를 달성해도 마찬가지였다. 여행을 가서도 팜플렛에 나와 있는 명소들을 향해 쉬지 않고 차를 몬다. 앞에 가족들을 내려주고 차에서 잠을 자는 나를 보며 아이들은 아빠가 무슨 운전사냐며 어이없어 한다. 하지만 그게 내 성격이고 내 인생이었다.

나는 6.25 한국 전쟁 중에 태어났고, 전쟁 후 잿더미가 됐던 한국과 함께 성장했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무조건 달려야 했다. 멈춰 서서 고민하거나 뒤돌아보는 것은 사치였다. 이런 나의 삶을 아이들은 답답해했다. “아빠는 취미가 없잖아요.”라는 딸의 말에 “아빠처럼 생명을 다루는 의사는 취미 생활할 시간이 없다.”라고 강짜를 놓았지만, 어쩌면 인생은 꼭 그런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건 나의 삶의 방식일 뿐이었다. 어쨌든 그런 나의 삶의 방식이 내게 주어졌던 난관들을 극복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됐다.

한국 회사들은 내 제안을 거절했고, 외국의 회사는 호의적이었지만 내가 거절했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나 자신, 그리고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뿐이었다. 그 중 한 회사만이라도 손잡을 수 있었다면 일은 훨씬 수월해졌을 것이다. 회사에서 연구를 마무리짓고, 시제품을 생산해 주었을 테니까. 내게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건 연구를 마무리 짓고, 웬만큼 완성된 시제품을 만들어서 생산만 작은 업체에게 맡기는 것이었다.

말로 표현하는 건 간단하지만, 실로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드는 작업이었다. 진료 시간 외에 주말도 없이 모든 시간을 연구를 하면서 보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연구였다. 그렇지만 우리 세대 대부분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좌절할 틈도 없었다. 그저 또 앞을 보고 달려야 했다. 그래서 나는 계속 달렸다.

진료 시간을 제외하고는 주말도 없이 연구에 매진했다. 미안한 마음에 가족들을 데리고 나와서 잠깐 병원에 들른다고 해 놓고는 두세 시간씩 가족들을 주차장에 방치하기 일쑤였다. 수술할 환자의 초음파 사진을 수십번씩 반복해서 돌려보고, 실제 수술하면서 부위를 확인하고, 수술 후 혈류 역학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관찰했다.

실제로 링을 적용했을 때 어떻게 해야 최선의 결과가 나타날 지를 수도 없이 연구했다. 만드는 방식, 삽입하는 위치, 걸리는 시간 등을 정밀하게 준비한 끝에, 1997년 말 처음으로 나는 링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링을 Song's Creating Ring 이라는 뜻으로 SC ring 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그 링을 이용하여 치료할 첫 환자를 선정했다.

그때까지의 대동맥 판막성형술은 판막의 움직임을 정확히 계산해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때 그때 의사의 재량껏 좁아진 부위를 넓히고 넓어진 부위를 좁히는 식으로 성형술을 했다. 내가 만든 공식은 바로 이 성형술을 정례화할 수 있는 열쇠였다. 더 정확하고 안전한 결과를 약속하는 치료법으로 첫 환자를 치료하는 순간이었다.

[인기기사]

·‘세계 최고’ 메이요클리닉, 한국에서 심장치료 노하우 전한다 [2014/01/06] 
·당뇨병시장 DPP-4 억제제 시장 경쟁 치열 [2014/01/06] 
·약계도 대정부 투쟁…"법인약국은 의료민영화 도화선" [2014/01/06] 
·“리베이트 의약품 건강보험 적용대상에서 제외” [2014/01/06] 
·“진료비정액제에 의사만 날도둑 취급” [2014/01/06] 

정심교 기자 simkyo@joongang.co.kr <저작권자 ⓒ 중앙일보헬스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위 기사는 중앙일보헬스미디어의 제휴기사로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중앙일보헬스미디어에 있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