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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3)<제자 박갑동>|<제31화>내가 아는 박헌영(172)-박헌영계 숙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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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승엽「그룹」에 대한 재판은 1953년 8월 3일에서 6일까지 평양에서 진행되었었다. 재판장은 김인선이며 담당판사는 방용숙·박영호였다. 검사 측은 명사부총장 김동학이 참가하였으며 이외에 재판기록에는 군관 김영주가 입회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김일성의 친동생 김영주는 인민군 총 정치국에서 중성 하나의 군복을 입고 한국에 대한 적진와해공작 즉 첩보·모략·파괴활동을 하고 있었으나 이승엽·박헌영 사건에 있어서는 검사의 역할을 하였다.
김영주는 이승엽·박헌영「그룹」에 대하여 직접 취조를 담당, 비인간적 고문과 모략으로써 조서와 기소장을 꾸민 검사총장 이송운, 검사부총장 김동학, 사회안전성(경찰서)의 사회안전국장 최풍랑과 더블어 이 사건을 꾸며낸 4악당중의 한 사람이다. 죄 없는 많은 사람들을 간첩으로 몰아 죽여 김일성을 위하여 「큰 공훈」을 이룬 이송운·김동학·최풍랑 등 세 사람은 그후 김일성에 의하여 추방 숙청 당하고 말았다.
김일성은 터무니없는 사건의 날조자들의 입이 무서워 만일 이후에 이 사건의 진실의 비밀이 그들의 입에 의하여 새어나갈까 두려워하여 담당 취조경찰관과 검사들 모조리 숙청하여 버리고 지금 남겨둔 것은 자기의 친동생 김영주 하나밖에 없다. 김영주를 남북조절위원회의 북한측대표로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측 대표들과 접촉시키지 않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경솔한 김영주가 언제 무슨 말끝에 이사건의 비밀의 일단을 누설할까가 두려워하여서이다.
도대체 간첩사건이란 보수와 대상이 필수적인 법인데 이승엽과 박헌영이 미국측에서 무슨 보수를 받았으며 무슨 대상을 받았단 말인가. 그들의 기소장과 재판기록을 아무리 주의 깊게 읽어봐도 받은 보수와 대상은 아무 것도 없다. 어느 누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아무 보수와 대상도 없이 내가 당신의 간첩이 되겠습니다 할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뿐만 아니라 물적 증거품도 아무 것도 없다.
김영주·이송운 등이 이사건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이점을 잊고있었다. 꾸며낸 이 사건의 기소장을 전적으로 신임한다 하더라도 파벌싸움으로 인한 정부전복 음모로서 국가보안에 대항하는 문제이지 간첩죄에는 해당할 수 없는 것이다. 「정부전복」음모라 하여도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전선에 있는 4, 5천명도 되지 않는 유격대로써 김일성의 「친위사단」과 중공군이 첩첩이 경비하고 있는 평양을 어떻게 공격하여 김일성 정부를 전복할 수 있단 말인가. 정부전복에 관한 사실도 전혀 없었다.
이 사건은 오로지 내전을 도발하여 인민생활을 도탄에 빠뜨리게 하고 스스로 곤경에 빠진 김일성 일파가 박헌영의 인기상승을 시기한 나머지 꾸며낸 음모인 것이다. 바로 박헌영에게는 허물을 둘러씌우지 못하니 우선 그 팔다리를 끊어 그 책임을 소급 전가시키는 방법을 채택한 것이라 할 것이다.
「이승엽 사건」의 판결은 다음과 같다.
▲사형 및 전 재산몰수=①이승엽(노동당비서 겸 인민검열위원회 위원장·경기도 부천군 영홍면 외리·1905년생) ②조일명=두원(문화선전성 부장·강원도 양양군·1903년생) ③임화(조소문화협회 부위원장·서울 가회동·1908년생) ④박승원(노동당중앙연락부 부부장·경북 영주읍·1913년생) ⑤이강국(무역성 일반제품수입상사 사장·서울 사직동·l906년생) ⑥배철(노동당중앙연락부장·서울 아현동·1912년생) ⑦백형복(한국 내무부 치안국중앙분실장·북한 내무성직원·전남 장흥군 옹산면·1917년생) ⑧조용복(인민검열위원회 상급검열위원·경남 밀양읍·1909년생) ⑨우종호(남조선 인민유격대 제10지대장·함북 경성군·1911년생) ⑩설정직(한국 공보부 여론국장·북한 인민군 총 정치국 제7부 부원·서울 효자동·1912년 생)
▲15년 징역 및 전 재산몰수=윤순달(노동당중앙연락부 부부장·전남 강진군 대구면·1914년 생)
▲12년 징역 및 전 재산몰수=이원조(노동당 중앙선전동부 부부장·경북 안동군 도산면· 1909년생) 이원조는 감옥에 들어간지 3년만에 드디어 분사하고 말았다.
이강국의 처와 임화의 처 지하연(여류작가)은 일시에 남편과 전 재산을 잃고 평양의 거리를 방황하다가 입은 옷을 팔아 밑천을 삼아 빈대떡장사를 시작하였으나 그것도 탄압으로 계속하지 못하게 되어 거지가 되고 말았었다. 이 사건과 아무 관계도 없는 작가동맹부위부장 이태준은 집필금지를 당하여 함흥으로 유배되어 출판사의 교정원이 되었으나 서울에서 가지고 간 가보인 서화까지 다 팔아먹고 거지가 되어 죽고 말았다.
작가 김남천은 이 사건 전에 쓴 단편소설 『꿀』가운데 인민군대가 전사할 때에 머리를 남으로 두고 죽었다는 묘사를 하였다고, 「숭남 사상」 즉 「반북 사상」=「반 김일성 사상」을 선전하였다는 트집으로 징역6년을 받아 그도 옥중에서 분사하고 말았다는 말이 있다.
노동신문 기사국장 유도명(남로당출신)은 『소주보다 약주가 좋다』고 하였다하여 북한 (소주)을 비방하고 남한(약주)을 숭상하였다고 5년의 징역을 받게되었다.
이남에서 간 작가·신문기자 등 문필가들은 거의 전부가 철직 및 집필금지를 당하고 말았었다.
이 사건이 나기 전에도 중앙당(대남 공작 부서인 연락부 만은 특수「케이스」, 민족보위성(군), 내무성(경찰), 검사국, 각 기관의 간부부(인사행정부서)에는 남로당원은 절대로 채용하지 않았었다. 즉 당과 정권기관의 중추부문, 권력부문에는 남로당원은 접근할 수도 없었다.
김일성의 종파주의와 지방주의의 배타성은 이렇게 유례없이 극심하였다. 일제식민통치 자들이 우리에게 대한 민족차별보다 김일성이 이남출신 자에 대한 지방차별이 더 심한 것이었다. <계속> 【박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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