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TV와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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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상당히 높은 관직에 있던 사람이 홀연히 그 자리를 버리고 말았다. 수삼년전의 일이다. 위로의 술자리에서 어째서 그만 두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변하던 것을 기억한다.
『동료들의 화제에 낄 수 없어서.』 『화제라니?』
『그 사람들 모이기만 하면 TV연속극 타령인데-우리 집엔 그게 없거든. 그들 축에 낄 수가 없어서 그만두어버렸지.』
그것은 한 개인의 기벽으로 웃어넘길 수도 있겠으나 또 하나의 사태-요즘은 TV「프로」가 지식층의 불신을 사고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 그의 경우를 인용한 것이다.
TV에 대한 지식층의 외면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이것은 고 「로버트·F·케네디」상원의원이 한 「탤리비전」평론가와 가진 다음과 같은 「인터뷰」에서도 나타난다.
Q=TV시청을 많이 하시나요?
A=아니오. 많이 안봅니다.
Q=실망했군요. 「뉴스」를 빼놓고는 저녁 「프로」에 전연 구미가 당기질 않는다는 말씀인가요?
A=정말 관심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안봅니다.
Q=그럼 댁의 자녀들은 많이 봅니까?
A=나이가 많은 애들일수록 덜 보더군요. 어려서는 재미있게 보다가 자랄수록 흥미를 잃어 가는 모양이지요.
『미국이 그 지경인데 우리처지에서야…』하고 우리나라 TV당사자들은 안도의 숨을 내 쉴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의 그 환경, 그 시설, 그 인원을 가지고 만든 그 「프로」들이 그렇게 소외당하고 있으니 우리나라 TV「프로」들이 우리나라 지식층에게 얼마나 외면 당하고 있겠느냐고 돌려 생각할 수는 없겠는가?
그 불신의 저변에 깔린 여러 가지 원인들을 파악하는 일이 오늘날 TV당사자들의 급선무가 아니겠는가.
그 원인의 하나로 지적하고 싶은 것이 요새 TV「프로」들의 시대조류에 대한 역행이다. 한 시대에는 그 자체의 추진력이 있는 법이다. 그 추진력에 대하여 요새 「프로」들은 역작용을 하고있는 것만 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일제 때 토착지주들이 민족의 운명과 장래에 얼마나 큰 역기능을 담당했었기에 그 알량한 과거에 대한 부질없는 「노스탤지어」냐 말이다. 장래에의 비약하고 현실에의 안주를 고집하는 지층에의 영합이 아니면 『이야기 줄거리』만을 좇는 저속한 시청자들에 대한 아첨밖에 안될 것이다. 나라의 문호를 활짝 열어놓고 세계만방에 웅비하고자 날개 치고 있는 시대조류에의 역행도 유만부동이라고 하겠다.
TV3국이라면 뭔가 각각 다른 주체성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 3국이 각각 시대조류에 순응하는 방향을 갖되 그 길을 별도로 설정할 수도 있지 않느냐 말이다.
요는 보도·평론, 그리고 「엔터테인먼트」의 세가지 기능에 있어서 3국이 각각 주체적인 사지-「에디토리얼·폴리시」를 가져 달라고 희망한다면 욕심이 과한 요구일까.
사지-이 경우는 『국지』라 해야 옳겠지만-로 흔히들 내세우는 것이 불편부당이요, 시시비비이다.
우리 TV국들도 보도나 논평 면에서 예외는 아니다.
비근한 예로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서면 계룡산구석을 뒤져서라도 『지구는 평면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찾아내서 『한편에서는…』하고 같이 보도하는 것이 불편부당이요, 객관적인 것으로 착각하고있는 것이다.
이런 고식적 태도에서 탈피하는 것이 곧 『국지』확립의 첫걸음일 것이다. 「로버트·케네디」가 제아무리 TV를 불신한다 해도 그의 형 「존」과 그 자신이 1960년과 64년에 TV의 힘을 빌지 않았던들 미국대통령과 상원의원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었으리라는 것만은 자인했었을 것이다.
TV와 지성의 타협이랄까, TV불신의 불식을 위한 여지는 충분히 있는 것이다. 지성의 참여를 좀더 과감하게 받아들일 것을 TV당사자들에게 제언하는 소이도 거기에 있다. 【심연섭<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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