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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노믹스에 밀리는 근혜노믹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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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수석논설위원

박근혜 대통령이 신년 인사회에서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를 앞당기자”고 했다. 올해 정부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3.9%다. 희망에 넘치는 반가운 소식들이다. 하지만 새해 벽두 금융시장이 보내는 신호는 불길하다. 코스피는 이틀새 65포인트가 떨어졌고 ‘100엔=1000원’의 환율 등식이 깨지는 것도 시간문제다.

 당초 우리 경제의 위협요인으론 미국의 출구전략과 중국 경제의 정체가 지목됐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환율과 주력산업의 수익성 악화가 발등의 불이다. 무엇보다 아베노믹스의 괴력이 심상찮다. 정부는 세계경제의 완만한 회복을 점치며 올해 수출증가율을 6.4%로 전망했다. 하지만 연초부터 원고(高)-엔저(低)로 차질을 빚고 있다. 삼성전자를 제외한 주요 90개 수출기업들의 올해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12% 뒷걸음질할 전망이다.

 올해도 아베노믹스의 기세는 대단하다. 국제 정치적으로 탄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미국은 ‘아시아로의 회귀’를 선언했다. 문제는 재정이 망가져 이 목표를 뒷받침할 여력이 없다는 점이다. 미국은 아시아 지역의 영향력 유지와 중국 견제를 위해 일본을 ‘골목대장’으로 밀고 있다. 그 대가로 엔 약세와 자위권 확대를 눈감아 줄 수밖에 없는 처지다.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도 ‘달러 강세-엔화 약세’를 부추기고 있다. 국제금융시장에서 올해 엔-달러 환율은 달러당 110엔을 돌파할 것으로 보는 분위기다. 이에 비해 한국은 경상수지 흑자가 22개월간 이어지면서 원화가치가 상방(上方)압력을 받고 있다.

 김대기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최근 펴낸 『덫에 걸린 한국경제』에서 “우리는 그동안 엔 강세를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으로 여겨 왔다”고 지적했다. 엔고(高) 때마다 반사 이익을 누리면서도 우리 실력인 양 착각해 흥청망청댔다는 것이다. 드디어 그 역풍으로 엔 약세의 호된 복수가 시작되고 있다. 그렇다고 정부가 무리하게 고환율 정책을 고집하기도 어렵다. 국민들 사이에 “수출 대기업만 챙기려느냐”는 불만이 만연해 있다. 지난해 이창용 국제통화기금(IMF) 아태국장은 “한국도 더 이상 엔화 탓을 그만하라”고 경고했다. 지난 20여 년간 일본이 엔 강세에서 살아남은 지혜를 배우라는 것이다. 한국 경제의 시련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엔저 역습으로 우리 기업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일본 기업들이 무차별로 가격을 인하하면서 TV·철강·기계류에선 한·일 간 가격 역전현상까지 빚어졌다. 엔저-원고는 투자에도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원화 강세로 기업들은 국내 투자를 망설이는 눈치다. 경쟁력 유지를 위해 대량생산으로 생산비를 낮추려면 중국·베트남 등지로 나갈 수밖에 없다. 올해 대기업 회장들의 신년사에도 ‘투자’와 ‘일자리’는 찾기 어렵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다(삼성 이건희 회장)”거나 “직접 현장 경영에 나서겠다(LG 구본무 회장)”며 위기의식을 강조했다.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은행 총재는 “엔 약세는 과도하지 않다”며 “양적완화는 2년을 넘길 수 있다”고 했다. 양적완화와 엔 약세를 더 밀어붙이겠다는 의도다. 이에 비해 근혜노믹스는 여전히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창조경제·일자리창출·경제민주화·한국형 복지 등으로 힘이 분산돼 아베노믹스에 밀리는 형국이다. 경제의 체온계인 환율과 주가부터 한국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아베노믹스의 파괴력은 미국의 묵인 아래 ‘한 놈만 팬다’는 데 있다. 경제 심리를 호전시키기 위해 극약처방도 불사한다. 반면 근혜노믹스는 좋은 정책 목표는 다 담고 있다. 그러나 경제학 원론은 “모두를 만족시키는 정책이 가장 나쁜 정책”이라 지목한다. “좋은 공약은 나쁜 정책이고, 나쁜 공약이야말로 좋은 정책”이란 말도 있다. 자칫 줄줄이 나열된 경제민주화·동반성장·골목상권 같은 목표가 사치스러운 한 해가 될지 모른다. 엔 약세의 저주에 맞서려면 근혜노믹스도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이철호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