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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사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9월이다.
조석으로 서늘한 바람이 분다. 한낮의 잔서는 아직도 여름만 같다. 그러나 밤에도 식을 줄 모르던 무더위가 아침·저녁의 분간도 없고 오늘과 내일의 구별도 없이 짓이기던 7, 8월의 그것은 아니다.
한낮은 따갑고 아침저녁은 서늘해지는 9월이 되면 우선 시간의 운행이 다시 제「리듬」을 되찾는 것만 같다. 조석의 윤곽이 뚜렷해지고 어제와 오늘의 경계가 분명해진다.
이제 요 얼마 전 저럼 문을 열어 젖힌 채 잘 수는 없으리만큼 밤 공기가 식어졌다. 처음으로 창문을 닫고 혹은「커튼」을 드리우고 문득 제 방안을 둘러보는 감회는 야릇한 것이었다. 안도 밖도 없이 터놓은 채 까발리고 지내던 한 계절이 이로써 끝이 나는 것이다. 오랜만에 다시 창문을 닫은 방안의 호젓함은 밖으로 밖으로만 내몰리던 몸이 갑자기 자기에 되돌아 온, 자기를 찾은, 자기에 직면한 그 호젓함이다.
9월이 오면 시간의 운행이라는 자연의 발자취만이 아니라 인간의 내부공간도 그 윤곽이 뚜렷해지고 자기와 외부와의 경계가 분명해진다.
머지않아 들에는 벼가 익는다. 사과가 익고, 배가 익는다. 이른바 오곡백과가 익는다는 9월이다.
자연에 있어 익는다는 것은 제 빛깔을 되찾는다는 것을 뜻한다. 나와 너의 구별도 없이 녹색의 일 여가 전제하던 여름 속에서 자연이 익으면 오곡백과만이 아니라 나무와 나무의 이파리들도 저마다 재 빛깔을 찾고 제 빛깔에 감 싸였다가 제 빛깔로 떨어져 죽는다.
9월은 자기에 되돌아와 자기에게 직면하는 달이다. 자연은 제 빛깔을 찾고 사람은 자아의 본연을 찾는다. 자연에 있어선 빛깔이 곧 결실의 본성인 것처럼 사람에 있어서도 그 본성이 한여름에 얼마나 성숙했던가에 따라 다양한 빛깔을 보이게 될 것이다.
9월은 또 귀뚜라미가 울고 여러 가지 벌레소리가 우리들의 귀에, 아니 우리들의 마음에 가까워 오는 계절이다. 벌레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에 무언지 동양적인 정적과 적멸이 깃들여 있다. 그것은 소리이되 시끄러움은 아니다. 그 소리는 가을밤의 고요를 깨뜨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고요를 더욱 북돋워 준다. 문을 열었다해서 더 잘 들리는 게 아니다. 문을 닫아야 들리는 것이다. 귀뚜라미 소리는 밖에서 오는 소리가 아니다. 그건 안에서 울리는 소리이다. 귀뚜라미 우는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9월은 사람마다 제 마음속의 소라에 귀를 기울이게 될 계절이다.
어찌 눈으로 보이는 빛깔이며 귀로 듣는 소리뿐이겠는가. 고래로 이 금수강산의 계절 치고서도 으뜸가는 계절이라는 가을은 전 감각적으로 온다. 추녀 끝에 말리는 송이버섯의 향기며, 그 매끈함이 묵은 쌀과는 전혀 다른 햅쌀밥의 맛이며 그리고 이부자리 밑에 손을 넣어보면서 새삼스러이 느끼는 방바닥의 감촉이며 가 모두다 가을을 느끼게 해준다.
바야흐로 결실의 가을이오, 사색의 가을이 시작된다. 문을 닫고 자기를 되찾아서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기의 본연으로 무르익는 심적이 있어야 될 계절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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