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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제값 받고 팔 수 있는 세상 주춧돌 놓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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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6호 28면

영국 잉글랜드 북서부의 랭커셔 주는 산업사나 노동운동사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산업혁명의 진원지이자 기계파괴운동(‘러다이트 운동’)으로 대표되는 근대 노동운동의 발원지이며, 세계 최초 협동조합인 ‘로치데일조합’ 탄생처이자 임기 내내 노동집단과 격렬히 대립한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런 랭커셔에는 2000년대 이후 다른 듯 같은 또 하나의 의미가 덧붙여졌다. 이름하여 ‘공정무역(Fairtrade)의 메카’다.

세상 바꾸는 체인지 메이커 <24> ‘공정무역 마을’ 창시자 브루스 크라우더

공정무역이란 남미,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같은 개발도상국 생산자들과의 공정한 거래를 통해 해당 지역 농민과 노동자들의 삶에 긍정적이고 지속적인 변화를 도모함을 말한다. 대개 환경친화적 농산물이나 제품을 직거래하는 소비자운동의 형태를 띤다. 핵심 정신은 ‘자선이 아니라 정의(Justice not Charity)’라는 홍보 문구로 요약된다. 일상생활에서 공정무역 인증마크가 부여된 제품을 소비함으로써 제3세계 사람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보장하고, 이를 통해 지속가능한 미래를 열어가자는 것이다.

이 공정무역 운동이 지구촌 곳곳으로 퍼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곳이 바로 랭커셔 주의 소읍 가스탕(Garstang)이다. 2001년 이 곳은 세계 최초의 ‘공정무역 마을(Fairtrade Town)’이 됐다. 이를 계기로 세계 25개국 총 1800여 개(2012년 말 기준)의 공정무역 마을이 생겨났다. 마을의 창시자는 브루스 크라우더(55·Bruce Crowther)다. 그는 “가스탕이 공정무역운동의 상징이자 롤 모델이 될 수 있었던 건 그야말로 이름 없는 평범한 시골마을이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특별한 점 하나 없다는 바로 그 평범함이 오히려 분명한 메시지를 전한다. 의지와 헌신만 있다면 세계 어느 곳의 어떤 공동체도 공정무역 마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란 것이다(크라우더 공저 『공정무역은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중). 실제 공정무역 마을 운동은 ‘풀뿌리 소비자운동’ 혹은 ‘풀뿌리 시민혁명’의 세계적 모범사례라 할 만하다. 창의적 활동가들의 끈질긴 헌신이 지역민들의 열정을 끌어내는 데 성공할 경우 어떤 위력을 발휘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지역민의 삶의 질과 만족도를 높일 뿐만 아니라 국제적 연대를 통해 인류의 공동선(共同善) 실현에 기여한다.

브루스 크라우더는 세계 최초의 공정무역 마을을 창안하고 이를 세계 25개국 1800여 개 지역으로 확산함으로써 풀뿌리 소비운동의 새 지평을 열었다. 영국 러시지역의 공정무역 화장품(발 마사지 크림) 생산을 축하하는 크라우더. [사진 가스탕 공정무역 마을 홈페이지]

세계적 구호단체 옥스팜 활동가로 출발
크라우더는 리버풀대에서 수의학을 전공한 수의사다. 그는 대학 졸업 직전인 1984년, 영국의 세계적 구호단체인 옥스팜(Oxfam) 활동가가 된다. 92년 결혼과 함께 가스탕에 정착해 동물병원을 여는 한편, 옥스팜 가스탕 지부를 설립한다. 이어 가스탕에 공정무역을 정착시키기 위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그는 가스탕이 공정무역의 진원지가 되기에 충분한 잠재력을 갖췄다고 봤다. 랭커셔 주처럼 산업화와 노동운동의 최전선에서 역사적 분투를 해온 영국 공업지역 사람들에게 ‘공정한 노동에 대한 공정한 대가’라는 공정무역의 모토는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언론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시의회나 종교단체들 또한 시큰둥했다. 크라우더는 극심한 좌절과 무력감을 느껴야 했다.

돌파구는 꿈결에 찾아왔다. 어느 날 밤 크라우더는 잠을 자다 불현듯 공정무역 마을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혹 잊을세라 펜과 종이를 찾아 이를 기록했다. 핵심은 개발도상국 생산자들과 가스탕 농민들 간의 공감대 형성이었다.

2000년 3월 ‘공정무역을 위한 2주간’ 행사 때 크라우더와 옥스팜 동료들은 지역사회 각 분야 대표들을 식사에 초대했다. 테이블에 놓인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은 공정무역 상품과 가스탕 지역 농산물을 활용한 것이었다. 크라우더는 공저서(共著書)에서 ‘개발도상국 생산자들에게 공정 가격을 지불하자는 공정무역 운동이 정당한 가격을 받고자 애쓰는 가스탕 농민들의 노력과 같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이 같은 이벤트를 기획했다고 회고한다. 예상은 적중했다. 참석자들은 공정무역 운동에 깊은 공감을 표시했다. 크라우더는 ‘가정 또는 직장에서 공정무역 제품을 사용하겠다는 서명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어 곧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크라우더와 활동가들은 행사 참석자들의 집과 직장을 일일이 방문해 서명을 독려했다. 교회, 학교, 동네 가게까지 빠짐없이 돌았다. 참석자의 95%가 서명에 동참했다. 이런 호응에 힘입어 그해 4월 지방의회 연례공청회에서는 가스탕을 공정무역 마을로 공표하는 의견을 통과시켰다. 가스탕의 성취는 세계 공정무역 운동의 새 전기(轉機)가 됐다. 2001년 11월 영국 공정무역재단은 가스탕을 ‘세계 최초의 공정운동 마을’로 공식 선포했다. 아울러 공정무역 마을(또는 도시, 섬, 구, 지방, 학교 등) 인증의 다섯 가지 기준을 공표했다. ▶지방의회의 공정무역 지원 결의와 제품 사용 ▶지역 상점의 공정무역 상품 구비 ▶지역 기업 및 사회기관의 공정무역 제품 사용 ▶지속적 언론 홍보와 캠페인 ▶공정무역 운영위 구성을 통한 지속 협력과 지원 등이다.

24개국 1200여 곳에 공정무역마을 생겨
영국 국내외 수많은 지역과 기관, 단체들의 가스탕 배우기가 이어졌다. 덕분에 영국 내 공정무역 마을 수는 2012년 말 현재 554개를 헤아리게 됐다. 해외에서의 성과도 눈부시다. 영국외에 세계 24개국 1200여 개 지역(2012년 말 기준)이 공정무역 마을 인증을 받았다. 영국은 ‘공정무역 수도’, 웨일스는 지역 전체가 공정마을 기준을 통과해 아예 ‘공정무역 국가’가 됐다. 특기할 만한 점은 아프리카, 남미 등 운동의 수혜 대상으로 여겨져 온 지역에서도 공정무역 마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물꼬 역시 크라우더가 텄다. 아프리카 가나의 뉴 코포리듀아 공정무역 코코아 마을 설립을 지원하는 한편, 가스탕과의 자매결연을 추진한 것이다. 이를 다시 미국 최초의 공정무역 마을인 펜실베이니아 주 미디어 시와 연결해 3개 대륙을 가로지르는 연대망을 구축했다.

가스탕 시는 2011년 마을 중심부에 공정무역마을국제센터(FIG)를 열었다. 세계 각지로부터 몰려오는 사회활동가와 관광객들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크라우더를 비롯한 몇몇 활동가들의 지칠 줄 모르는 의지와 행동력이 지역민 전체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것이다. 크라우더는 세계적 명성을 얻은 뒤에도 여전히 가스탕에 살며 지역 봉사자이자 파트타임 수의사로 활동 중이다. 흔히 정부는 물론 각종 단체에서는 변화의 동력을 조직 정비나 예산 확보에서 찾는다. 하지만 가스탕의 성공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결국 진정한 힘은 사람, 그리고 연대에서 나온다. 사회 변화를 주도하려는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역량이 열정과 창의성, 네트워킹 능력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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