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신년사를 읽으면 한국 경제가 보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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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신년사를 읽는 것만으로 ‘기업사(史) 이해’를 대신할 수 있다. 신년사에 내비친 대기업 총수들의 당당함과 비장함은 롤러코스터를 탄 한국 경제의 영욕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어서다.

 1990년대 중반까지 대기업 신년사엔 호기(豪氣)가 묻어났다. 김우중(78) 전 대우그룹 회장은 “대우가 주력할 업종은 21세기 대표 산업으로 부상하는 자동차 분야”(95년)라며 과감한 투자 확대를 선언했다. 김석원(69) 전 쌍용그룹 회장은 96년을 ‘선수(先手) 경영 정착의 해’로 명명하면서 “기동성 있고 진취적인 경영 체질을 갖춰 달라”고 독려했다. 하지만 이듬해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30대 그룹 중 16곳이 좌초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직후에는 총수들의 음성이 사뭇 비장해진다. 의례적인 신년 덕담도 생략한 채 “현금 확보” “불굴의 의지” 등을 일성으로 내세웠다. 대우·SK는 98년 그룹 시무식을 열지 않았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같은 해 신년사에서 “기업인의 한 사람으로서 경제 파탄에 대해 해야 할 일을 다하지 못했음을 후회한다”는 자기반성을 했다.

 대기업 신년사가 활력을 되찾은 건 2002년이 돼서다. 2001년 8월 구제금융자금을 상환하면서 IMF 체제를 조기 졸업하고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기업이 약진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 이때부터 신년사엔 ‘도전’ ‘일등’ ‘혁신’이라는 표현이 유행이 됐다.

구본무 회장의 ‘일등 LG’라는 슬로건도 이즈음에 나왔다. 김승연(62) 한화그룹 회장은 “지금까지와는 새로운 길을 가야 한다”(2002년)고 강조했다.

 최근 신년사에서 단골 문구로 떠오른 ‘사회적 책임 강화’가 본격 등장한 것은 20여 년 전이다. 이건희 회장은 94년 신년사에서 “사회공헌은 삼성이 선도 기업으로서 지속적이고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2000년대 중반만 해도 사회공헌은 신년사의 맨 뒷자락에 실리는 ‘양념’ 같은 항목이었다면 요즘엔 대세다. 조양호(65) 한진그룹 회장은 지난해를 “함께 같이 가는 ‘동행의 해’”(2013년 신년사)라고 명명했다.

 최근 신년사에서는 투자와 고용 확대, 협력업체 지원 등을 주요 메시지로 쏟아내고 있다. 글로벌 저성장 기조와 내수 침체, 원화 강세라는 악재 속에서도 ‘따뜻한 기업 시민’으로서 역할을 늘리겠다는 다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강조한 경제 민주화에 동참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성장을 최우선으로 내세웠던 이명박정부 시절 이들의 신년사에는 ‘글로벌 경영’ ‘투자 확대’ ‘성장동력 발굴’ 등이 앞자리에 배치됐었다.

 성의 없는 동어반복과 과도한 레토릭(수사)으로 체면을 구긴 신년사도 있다. C그룹의 신년사는 연도와 수주 목표 등만 가리면 언제 발표한 자료인지 구분이 어렵다. D그룹 총수는 “투자를 실기(失機)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실제 그해 투자 집행은 평년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한편 ‘회장 부재’ 내지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인 SK와 KT·한화·CJ·효성 등은 올해 총수 명의의 신년사를 발표하지 않았다. 사임 의사를 밝힌 정준양(66) 포스코 회장은 “글로벌 1위인 경쟁력·수익력을 방어하기 위해 매진하자”는 다소 소극적인 신년사를 내놓았다.

이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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