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책] 앨리스 먼로, 신산한 삶 견뎌낸 문장이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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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중앙일보와 교보문고가 함께 하는 ‘이달의 책’ 1월 주제는 ‘책의 힘, 글의 맛’입니다. 한 해를 시작하며 책 읽기의 즐거움, 글의 힘을 일깨우는 신간을 골랐습니다. 지성과 감성을 채워주는 책과 더불어 풍요로운 한 해를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디어 라이프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문학동네
400쪽, 1만3500원

이렇게 들렸다. ‘디어, 라이프(Dear, Life)’. 편지를 여는 첫 문장처럼, ‘친애하는 삶’으로.

 ‘현대 단편소설의 거장’으로 불리며 단편소설 작가로는 처음으로 201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캐나다 작가 앨리스 먼로(83)의 최신작인 이 책은 삶에 보내는 먼로의 편지로 읽힌다. 게다가 삶의 굽이를 돌아온 노작가의 마지막 소설집 문패로는 안성맞춤이다. 그는 이 책을 끝으로 절필을 선언했다.

 기승전결의 구조로 이야기를 직조하며 펼쳐내는 장편에 비해 섬광처럼 반짝하는 순간을 낚아채는 단편은 소품으로 여겨지기 쉽다. 하지만 우리를 전율케 하고 마음을 뒤흔드는 찰나는, 어쩌면 인생의 숨어 있는 1인치 혹은 뭉뚱그렸을 때는 깨닫지 못하지만 그 1인치에 집중해 찍은 스틸 사진에서 도드라지는 어느 지점에 있을지 모른다. 먼로의 소설을 읽으며 느끼는 섬뜩함처럼.

 멀찌감치 바라보는 일상은 대부분 소소하게 보인다. 그렇지만 한발씩 다가가면 그 소소한 삶에도 끓어오르는 욕망과 충동, 불안과 혼란이 격랑처럼 몰아친다. 먼로의 소설은 단편 ‘돌리’ 속 주인공의 말처럼 ‘너무 과하지도, 너무 모자라지도 않게, 딱 적당히’ 평범한 삶 속 평범하지 않은 순간들을 잡아낸다.

 결혼생활에 권태를 느끼며 호감을 가졌던 남자를 만나겠다는 희망에 길을 나선 여성 시인의 이야기(‘일본에 가 닿기를’)나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한 돈 많은 여성과 유부남의 연애사(‘코리’)는 서늘한 순간을 품고 있다. 남편의 옛 연인을 집에서 재우게 된 노부인의 가출기(‘돌리’)나 혼자서 병원을 찾아가느라 고군분투하는 건망증 심한 할머니의 이야기(‘호수가 보이는 풍경’)에는 슬며시 웃음이 번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무엇보다 먼로의 장기는 수없는 감정의 물결이 오고 간 마음결을 더듬는 작가의 담담한 문장에서 발휘된다. 이를 테면 결혼식 당일 헤어진 연인이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우연히 조우하는 단편 ‘아문센’의 마지막 부분처럼.

 “우리가 지금 각자 가는 길을 계속 갈 것이라는 사실 또한 그만큼 확실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했다. 격한 울음도 없었고, 내가 보도에 다다랐을 때 내 어깨를 잡는 손도 없었다. (중략) 사랑에 관한 한 정말로 변하는 것은 없다.”

 문장이 남기는 여운과 감동은 길다. 위로도 선사한다. 눈 깊은 할머니의 따스한 손길로 어깨를 다독이듯 . 앉은 자리에서 책을 완독할 엄두는 내지 마시라 경고해둔다. 그럴 수도 없는데다 인생에 대한 예의도 아닌 듯 여겨져서다. 사실 이 부탁도 기우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 테니.

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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