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신저」 외교 노선의 저변 확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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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닉슨」 행정부의 제2기 시작 이후 줄곧 억측으로 전해져 온 「로저즈」 해임과 「키신저」의 국무장관 임명을 직접 발포하면서「닉슨」 미 대통령은 「로저즈」가 「닉슨」의 첫 임기가 끝났을 때 벌써 개인 생활로 돌아가고자 했다는 단서까지 달았다.
그러나 「닉슨」행정부의 내막 특히 백악관·국무성 관계를 잘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로저즈」가 백악관 압력 때문에 일종의 「권고사직」을 당한 것이라고 말한다. 「닉슨」과 「키신저」가 「로저즈」를 마땅치 않게 여기기 시작한 것은 오래 전부터의 일이다. 특히 「로저즈」 「키신저」 관계를 정확히 말한다면 「로저즈」와 「키신저」간의 의견 대립은 공공연한 비밀로 통했다.

<「로저즈」와 이견 심각>
일반적으로「키신저」는 강경파로 통하고 「로저즈」는 「닉슨」 행정부의 온건파로 알려졌다.
「베트남」 문제에서 「로저즈」의 속마음은 미국의 개입을 조속히 종결하는 것이었고 「키신저」 「닉슨」 정책노선은 휴전의 조건으로 존속 가능한 「사이공」 반공 정부를 월맹으로부터 보장받을 때까지 압력을 가하는 것이었다. 「닉슨」 「키신저」 강경 정책의 가장 극적인 예가 1972년 「모스크바」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폭을 강화한 사실이다.
중동 문제에선 의견 대립이 한층 심각했다. 유대인 「키신저」는 중동문제는 가급적 건드리지 않고 현상을 유지하려는 태도였고 「로저즈」는 「이스라엘」에 계속 압력을 가하여 l967년 「유엔」안보리 결의를 준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최근 「레바논」 항공기 납치사건에 대해 「유엔」 안보리에서 미국이 「이스라엘」 규탄 결의에 가담한 것은 말하자면 「로저즈」 노선 실현이었다.
그러나 「로저즈」를 「닉슨」 진영에서 결정적으로 이탈시킨 것은 「워터게이트」사건이다. 특히 지금 「닉슨」을 궁지에 몰고 있는 것은 도청과 「테이프·레코드」사건이다.
「로저즈」는 「워터게이트」 사건 자체에 환멸을 느낀 것으로 전해져 왔다.
최근 기자 회견에서 「로저즈」는 마침내 공공연히 「닉슨」의 비위를 건드리는 발언을 했다. 「로저즈」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국가안보회의 라는 것에만 지나치게 정신이 팔려 법률을 함부로 위반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국가안보위 때문에 법률을 어길 때는 극도의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공언한 것이다.
이것은 「닉슨」의 지금 심사로 보아 그의 상처를 건드리고도 남을만 하다.
「로저즈」장관은 또 지금 말썽 중인 「크메르」 폭격에 대한 이원적인 보고 제도에도 언급, 자기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강조하여 이를 은근히 비판하는 자세를 취했다.
물론 「로저즈」쪽도 불만은 크다. 「키신저」 보좌관이 월남 협상, 북경 방문, 「모스크바」 방문 같은 주요 정책 입안은 물론 이의 집행까지 한 손에 장악하여 「바지저고리」로 만들어 놓았다.
실상 「로저즈」의 존재는 「키신저」의 화려한 외교 행각 그늘에 가려 잊혀진 사람 같았다.
그래서「닉슨」2기 정권에서 「로저즈」는 개인 생활로 돌아갈 것을 진지하게 고려한 것이 사실이다. 「워싱턴」에는 그의 법률사무소가 있어 동업자의 손으로 성업 중이다.

<박력 있는 국무 바라>
그러나 「로저즈」는 지난 1월 유임이 결정된 뒤로는 장기 복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최근만 해도 그는 오는 가을 「닉슨」대통령과 함께 「유럽」여행 계획을 논의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 「로저즈」의 사임을 바라는 백악관의 압력이 가동된 것으로 들린다. 「닉슨」은 보다 박력 있는 국무장관을 바란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프로페시던트」(교수라는 뜻의 「프로페서」와 대통령이라는 뜻의 「프레지던트」의 복합어)라고 불리는「키신저」의 머리에는 또 하나의 관이 씌워졌다. 「슐츠」재무장관과 함께 또 하나의 초내각 각료가 탄생된 셈이다.
「닉슨」 대통령은 「키신저」가 국무장관이 됨으로써 백악관·국무성 관계가 개입되고 협조가 한층 긴밀해 질 것이라고 참언 했다. 그러나 9월 3일 「키신저」 취임 후 백악관·국무성 관계는 대등한 협조관계라기보다는 백악관의 국가안보위원회의 손에 국무성이 접수 당한 꼴이 될 가능성이 있다.
「키신저」의 국무장관·겸직 발령은 지금까지 백악관이 외교정책의 수립과 집행을 사실상 독점한 사실을 공식화하는 조치로 볼 수 있다. 이는 백악관의 권력 집중의 거보이다.
이제 「닉슨」 행정부의 내각은 「닉슨」 대통령이 원래 구상한 대로 경제분야의 「슐츠」, 국무안보분야의 「키신저」, 인문사회의 「리처드슨」에 의한 「트로이카」(3두 체제) 위에 정좌하게 된 것이다.
「닉슨」은 자기 스승인 「케네드·러쉬」를 국무차관에 앉히면서 전통 있는 이 나라 외교관들의 아성이라는 국무성에 일단 교두보를 구축했다. 이번에 「키신저」를 내세워 그것을 냉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그 동안 들린 소문대로 된다면 국무성 고위관리 중에 상당수가 그 자리를 떠나고 대신 국가안보회의 요원들로 메워질 가능성이 크다.
「닉슨」행정부의 외교정책은 워낙 「로저즈」 것이 아니라「키신저·라인」이었다. 따라서 국무장관 경질이 이 나라 대외정책에 하등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대 한국정책 역시 예외가 아닐 것이다.

<가장 바쁜 국무장관 될 듯>
그러나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군사 국가들은 백악관과는 신통한 대화의 「채늘」을 갖지 못하고 미국 외교정책 수립 과정의 외곽에서 맴도는 국무성 하에만 줄을 대는 수밖에 없었다.
「로저즈」 퇴진, 「키신저」 등장은 어쩌면 한국 같은 나라에는 설상가상이 될지도 모른다.
「마선·그린」 차관보의 전출, 「로저즈」 사임으로 이제 국무성에서 한국을 안다고 나설만한 사람은 「윌리엄·포터」 정도다.
특히 최근 한국·일본 방문중에 들을 수 있었던 「로저즈」의 한국에 관한 호의적이고 적극적인 발표 같은 것을 보면 그의 「권고사직」은 아쉬움을 남긴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키신저」를 가지고 국무장관 「키신저」를 판단컨대, 그는 아마도 힘없는 나라들에는 항상 「너무 높고 너무 바쁜 국무장관」 일는지도 모른다.

<「키신저」 그 인간과 생애>「메테르니히 외교」에 심취|「덜레스 이상」의 권한 장악|여성 편력 화려한 독신의 정력가
미국의 새 국무장관으로 임명된 「키신저」는 백악관의 안보 담당 특별보좌관도 겸하게 되기 때문에 그의 권한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으로부터 외교 문제에 관해 사실상 백지위임장을 받은 「존·포스터·덜레스」 국무장관에 비견되거나 그 이상의 것이 될 것이다.
69년 1월 20일 「닉슨」 행정부의 출범 때부터 「키신저」는 대통령 안보문제 특별보좌관으로서 미국의 중대 외교정책을 사실상 입안 관리해 왔던 만큼 그의 국무임명으로 미국의 대외 정책은 변화가 예상되지는 않는다.
「키신저」는 「헤겔」 「슈펭글러」 「토인비」 연구를 「마스터」, 학위 논문 제목으로 택했고, 「빈」 회의의 주역을 맡은 「메테르니히」에게 심취한 야심가다.
그는 항상 역사를 의식하는 천재다. 월남 휴전, 북경 방문 같은 것은 미국 서부의 청빈한 중산계급에서 몸을 일으켜 마침내는 「세계의 대통령」 자리에 올라 한번 청사에 이름을 날려 보려는 「닉슨」의 야심과, 15세 때 「나치」에게 쫓겨 미국에 이주한 유대인 소년에서 입신하여 「메테르니히」와 같은 역사의 반열에 올라서려는 천재 「키신저」의 합작품이었다.
「키신저」는 외교 문제를 구조적으로 파악, 해결 방법을 모색해야 된다고 늘 주장해 왔다. 구체적으로 그의 이러한 입장은 권력 정치, 실리 정치의 영향을 강하게 띠게 되었으며 월남전 해결 과정을 통해 무자비한 형태로 나타났다. 이러한 외교 방법은 강대국간의 은밀한 합작 내지 묵계를 그 주동력으로 삼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주변국들의 의혹을 살 가능성을 언제나 내포하고 있다.
「키신저」 박사는 9년 전에 이혼한 후 독신으로 살면서 외교 문제 외에 특히 여성미 감각에 탁월한 인물이다.
흔히 아리따운 여배우와의 사진으로 신문 지면을 장식하기도 하는 「키신저」 박사는 백악관의 「섹스·심벌」로 까지 묘사되기도 한다.
「키신저」는 상관으로서는 매우 가혹한 인물로 평가되는데 1백 명이 넘는 백악관 보좌관 실의 그의 부하들에게는 폭군 같은 상관이라고. 【워싱턴=김영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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