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급 살인죄로 종신형, 70대 한인여성 애끓는 사연

미주중앙

입력

홍인숙씨가 링컨교도소에서 기자에게 보내온 편지와 크리스마스 카드. 둘 다 모두 “주님이 사랑하시는…”으로 시작된다.
한인교회 여성연합회 시카고 지역(회장 김숙영 권사) 임원들이 18일 오전 시카고제일연합감리교회(김광태 목사)에서 모임을 갖고 한인 재소자들을 위해 기도했다. 특히 살인 사건으로 15년째 복역 중인 한 한인 여성 재소자를 위해 합심 기도를 올렸다. 여성연합회 시카고 지역 회원들은 세계 기도일 예배 중 작은돈 헌금 시간을 별도로 마련해 이 중 일부를 지난 10여년 동안 한인 재소자들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 사진은 송성자 목사, 김숙영 회장, 김신 부회장(왼쪽부터 차례로)이 한인 재소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임명환 기자

R35801. 1943년생인 홍인숙씨의 죄수 번호다.

홍 씨는 시카고에서 남쪽으로 3시간 거리인 링컨교도소에 수감돼 있다. 죄목은 1급 살인. 지난 1998년 8월 자신의 남편을 총으로 쏴 숨지게 한 죄로 감형없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15년째 복역 중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1969년 미군 부대에서 근무하던 남편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중앙일보는 링컨교도소를 직접 방문해 홍 씨를 면회하고 이후 직간접적인 연락을 통해 그녀의 삶을 소개한다.

자상한 군무원 출신 남편
집에선 폭력으로 괴롭혀

남편 마이클 존스와는 서울에서 만났다. 당시 남편은 미군 부대에서 근무하던 군무원이었고 매너가 좋았다. 백인과 결혼하고 가족이라고는 전혀 없는 미국에 온다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성실하고 근면한 남편만 믿었다. 부대에서도 남편에 대한 평이 좋았던 점도 맘에 들었다.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고 한동안 남들 부럽지 않게 화목한 가정을 꾸렸다. 유나이티드항공에서 근무했던 부부는 착실하게 돈을 모아 블루밍데일에 집도 구입했다. 당시로는 꽤 비싼 편이었고 보험 등을 포함해 재산이 100만달러에 달했다. 그러나 결혼생활이 10년차에 접어들며 남편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밖에서는 여전히 좋은 품성의 가장이었지만 가정에 오면 홍씨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범행이 일어나기 얼마 전에는 남편으로부터 구타를 당해 집 식당에 쓰러진 일도 있었다. 경찰은 부르지도 않았는데 집으로 들어와 홍씨를 발견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남편이 폭행 가해자라고 미리 신고해 선수를 친 것이었다. 가정폭력을 참을 수 없어 쉘터를 알아보기도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사고는 1998년 8월 23일에 터졌다. 이 충격적인 사건을 홍씨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경찰서에 있었다. 온몸에 피가 잔뜩 묻은 채였다”고 설명했다. 홍씨는 사고 후 변호사를 선임해 재판을 받았다. 문제는 그 뒤에도 이어졌다. 아들이 어머니가 범인으로 확정되면 가진 재산을 다 빼앗길 수 있다며 재산을 넘길 것을 요구했다. 홍씨는 선택이 여지가 없었다. 단 한명인 아들을 믿는 수밖에.

재산을 넘긴 뒤로는 아들과의 연락이 뚝 끊겼다. 낙심한 홍씨는 재판을 끝까지 받지 않았다. 판사에게 ‘유죄를 인정하니 선고해 달라’고 요청, 종신형을 받았다. 비록 1급 살인이기는 하지만 특별한 범죄기록이 없었던 홍씨가 감형없는 종신형을 받은 것은 이때문이었다.

전 재산 가진 아들 소식 두절
고령…주지사 사면에 기대

지난 8월23일. 일리노이 링컨교도소 면회실. 면회를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사전에 홍씨와 편지를 통해 기자의 인적사항을 알려야 했다. 이후 홍씨가 교도소측에 방문자가 있다는 것을 통보하고 나서야 면회가 가능했다. 8월의 시카고는 더웠다. 링컨교도소는 최근까지 드와이트교도소에서 이감된 여성 죄수들이 수감돼 있었다. 인접한 로간교도소는 남자 죄수들을 수용하고 있다.

까다로운 신분 확인 절차를 끝내고 면회실로 가서 10여분을 기다렸을까. 홍씨가 홀로 면회실로 들어섰다. 키 150cm 가량에 매우 마른 체형과 백발. 개성이 고향이라는 홍씨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인상의 한국 할머니였다. 홍씨와의 대화를 앞두고 간단한 음료수와 먹거리를 자동판매기에서 구입했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전자레인지에서 데워 먹는 프라이드 치킨을 구입했는데 홍씨는 교도소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먹어보는 프라이드 치킨이라 했다.

“이제 제가 무엇을 더 원하겠습니까. 그저 죽기 전에 바깥 세상을 보고 조용하게 살다 삶을 정리하고 싶을 뿐입니다.”

“교도소에 면회왔던 한인교인들과 우연하게 연락이 닿아 한인사회에 제 소식을 알리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죽으면 시신이 어떻게 처리되는지가 궁금했지요.”

“제가 무죄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나 사면이 가능한지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홍씨의 사연을 접한 서정일 한인회장은 사면을 조심스럽게 추진하고 있다. 사면을 명령할 수 있는 팻 퀸 일리노이 주지사를 만나 홍씨 소식을 알렸다. 사면까지는 적어도 1~2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홍씨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긴다고 했다.

최근 홍씨가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왔다. “주님이 사랑하시는…”으로 시작하는 카드에서 홍씨는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인내를 훈련시켜 주시면서 저의 영혼을 강하게 하고 계시니, 오직 감사할 뿐입니다”라고 적힌 카드는 누가복음 인용문으로 끝났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너희에게 전하노라 하셨습니다.”

박춘호 기자 polipch@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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