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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792>내가 아는 박헌영 <제31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박헌영이 해주에서 서울의 당을 원격조종함으로써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을 때 김일성은 남한 지역에 북노당의 지하 조직, 즉 자기세력을 심으려는데 무척이나 안달을 했다.
그 예가 앞서 말했듯 당초 남노당의 분파당으로 사회 노동당을 만들었지만, 그 세력은 3, 4백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 정당으로서 조직활동을 해 나갈 사상통일도 되지 않았었다.
이에 당황한 김일성이 계획한 것이 이른바 47년 5월의「북노당 남반부 정치위원회 사건」 으로 불리는 간첩 성시백 사건이다.
성시백은 황해도출신으로 일찌기 중국으로 건너가 중공 당에 입당하여 중공당의「프락치」로서 국민당에 가입하고 국민정부의 중앙군중령으로 복무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한 마디로 그는 해방 전부터 첩보와 적진와해 공작의 풍부한 경험을 가진 이름 있는「에이전트」였다.
그는 46년12월 중국에서 부산을 거쳐 서울에 와 잠깐 머물러 있다가 공산당 소굴을 찾아 월북했었다.
그때 그는 김일성·김두봉과 만나 남노당과는 별도로 서울에 「북노당 남반부 정치위원회」라는 조직을 세울 것을 모의하고 47년5월 월남, 서울에 잠입했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박헌영이 비록 해주에 있었지만, 엄연히 살아 있었기에 문제가 있었다.
소위 1국1당 원칙으로 남한에 남노당이 있는데 그것과 경합하여 같은 공산 조직을 만든다 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공산주의자의 모임이 아닌 중간분자들을 흡수한다는 구실을 붙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남노당을 와해시키기 위한 정당조직에 그 목적을 두었던 것임은 당시 공산당원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당시 성시백이 서울에 잠입한 뒤 제일 먼저 접선한 대상자가 다름 아닌 공산당에서 제명 당한 강진·이정윤·이우적·이용선 등이었으나 그 면면을 보더라도 성시백을 남파한 김일성의 속셈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성시백의 이 조직을 당시 우리는 북노당 남반부 정치위원회라고 불렀다. 이 조직의 특징은 한 마디로 막대한 정치자금을 쓴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만 해도 38선과 인천·주문진 등에서 행해지는 남북교역과 인천과 중국의 청도, 석도 등을 통한 「루트」와, 또는 향행「루트」를 통하여 막대한 정치자금이 보급되었다.
그 때의 막대한 돈은 47년12월1일 북한이 화폐개혁을 단행, 「북조선중앙은행권」을 발행함으로써 더욱 늘어났다. 당시 북한은 약30억 원의 구 화폐를 몰수하여 남한에 밀송하면 공산당 및 좌익세력을 지원할 수 있고 남한의 경제를 교란시킬 수 있었다는 두 가지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조선은행권이 통용된다는 점을 악용한 이 교활한 수법은 실체로 남한 경제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으며 마침내 유입되는 조선은행권을 막기 위해 48년4월7일 남한에서도 조선은행권 1백원 권을 교환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어쨌든 성시백은 이 돈으로 서울에「조선중앙일보」 와 「우리신문」 이란 2개의 신문사를 경영하는 한편, 시내 13군데에「아지트」 를 두었다. 또 위장사업체로 서울운동장 옆에 대규모의 이발소를 갖고 있었다.
성이 서울에서 활동을 시작한 뒤 어느 날 「조선중앙일보」 주필인 이우적에게 『선전목적이 무엇이냐』 고 물었더니, 그는 북한과 중공을 선전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 자리에서 이우적은 나에게 남노당에서 유능한 활동가를 소개해 주면 생활비는 풍족히 지급하겠느라고 크게 자랑했던 기억이 있다.
이는 그때 내가 쓰고 있던 「아지트」몇 개를 양도해 달라고도 했으나『나는 남노당원이므로 당을 해치는 당신의 요청에는 협력할 수 없다』고 거절한 일이 있다. 당시 나의 사상과 성격으로 양다리를 걸칠 수는 없었다.
그 뒤 소문을 들으니 하부조직에서 남노당과 성시백조직과 마찰이 생기고 생활이 궁핍한 당원을 뺏어 가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대대적인 매수공작을 벌였던 것 같다.
성시백의 이러한 활동을 박헌영은 해주에서 모조리 보고를 받고 있었으나 김일성에게는 아무 소리 않고 참고 있었다.
아마도 박헌영은 성이 막대한 자금을 쓰고는 있지만, 자기의 아성인 서울에서 특별한 조직활동을 벌이지 못할 것이고, 다만 남노당의 동태를 평양에 보고하는 하나의 첩보기관 같은 구실밖에 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사실 남노당원 사이에서도 성시백의 조직을 정보조직 정도로 밖에 취급하지 않았다.
당의 이러한 판단은 뒷날 이 조직의 부책이었던 김명용이 체포되고, 이어 성시백이 검거됨으로써 조직전체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들였다 하지만, 김일성이 서울에다 당성이 있는 정당을 조직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6·25때 북한군은 성시백이 김일성의 교시를 생명보다 중하게 받들다 죽었다고 선전하며 그의 시체를 파내어 영웅으로 만들려 했으나 끝내 그의 시체를 찾지 못하자 지금은 성시백 사건을 깡그리 감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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