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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0)|인도군의 포로 관리 (5)|설득 설전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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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중립지대 안의 반공 포로들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인도군 포로 관리의 초점이었던 이른바 「설득 설전」에서도 개가를 올렸다.
우선 반공 청년단 조직과 수용소 단위로 편성된 포로 자치 기구인 「대대」 조직을 이원적으로 십분 활용해서 행동 통일을 다지는 한편 공산 측의 선전과 회유를 물리칠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10월7일에는 단절된 수용소 안의 소식을 정부에 알리고 지원을 호소키 위하여 2명의 반공포로 밀사가 교묘한 수법으로 중립지대를 탈출, 함태영 부통령을 만나고 강력한 협조를 얻는데 성공했다.
이 두 밀사를 통해 반공 포로들의 현황을 들은 이승만 대통령은 헌병 총사령관 원용덕 장군에게 최대한의 지원을 해주도록 명령함으로써 헌총사와 중립지대의 반공 수용소간에는「드릴」에 찬 연락과 갖가지 작전 지령이 오갔다.
설득 설전에 임하는 전략과 주장은「유엔」측, 한국 정부와 반공 포로, 공산 측의 3자가 제각기 달랐다.

<「트럭」밑에 붙어 두 밀사 탈출>
즉 한국 정부와 반공 포로들은 「설득 거부」였고 「유엔」군은 「규정대로의 이행」을 원했으며 공산 측은 무력에 의한 강제 동원의「설득 강행」을 고집했다.
반공 포로 자체 안에도 정정당당히 설득을 받자는 온건파와 절대 거부하자는 강경파가 있기는 했다. 받지 말자는 측 주장은 일사불란한 행동 통일과 변절 이탈자를 방지키 위한 것이었고, 「받자」는 쪽은 귀환자가 절대 없다는 자신에서 비롯한 것이었을 뿐이지 이들의 근본적인 반공 이념이나 투쟁 목표에는 전혀 분열이 있을 수 없었다.
부산 수용소와 병원 수용소 출신의 반공 포로들은 헌총의 지령과 지원을 배경으로 한 투쟁을 전개했고, 논산 출신들은 인도군들 태도가 「반공」쪽으로 기울도록 압력을 넣으며 악화된 대 인도군 감정을 해소시킨 후 설득장에 나섰다.
이 같이 강경파인 부산 지부와 온건파인 논산 지부의 반공 포로들은 상호 유기적인 연락 하에 거부와 순응의 양면 전술을 능수 능란하게 구사하면서 설득 설전을 치렀다.
중립국 송환 위원회의 결정권과 비무장지대의 포로 관리권을 모두 쥐고 있는 인도는「설득」을 둘러싼 사사건건의 시비 틈에서 완전히 「샌드위치」가 되어 곤경에 빠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인도는 결정적인 문제에서는 늘 우리측에 유리한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다음은 설득 설전을 치른 관계자들의 이야기.
▲한은송 씨 (당시 중립 지대 제40수용소 대대장·현 대한 반공 청년회 회장·51) <인도군 관리하로 돌아간 후 외부와의 연락이 일체 두절된 채 불안한 상태로 「의지」와 지원을 갈망하던 우리 반공포로 간부들은 우선 밀사를 내보내기로 결의했습니다.
내가 주동이 돼 10월7일 한승태·박동혁 (고인) 두 동지를 서울로 밀파시키는데 성공했어요. 이들의 사명은 정부 요료에 현재의 우리 반공 포로들의 실정을 상세히 보고한 후 「지원」을 받아내는 거였어요.
밀사들의 수용소 탈출은 변기 통을 운반하러 들어온 인도군의 「트럭」밑에 붙어서 나왔는데 오물 통들을 운반하는 포로들이 각본대로 수선을 떨며 일을 거들어 주는 사이에 차 밑에 송판 짝을 걸치고 한·박 두 동지가 납작 엎드려 붙었어요. 사실은 며칠을 두고 철저한 예행 연습까지 해 놨었구요.

<이 박사, 혈서 받고 석방 결심>
인도군 수송부 차 밑에서 날이 어둡기를 기다렸던 밀사들은 야암을 타고 인근한국군 노무부대로 달려들어갔어요.
부대장 남궁 소위는 이들을 노무자로 가장시켜 자기 「지프」에 태워 서울 함태영 부통령 공관까지 데려다 줬구요.
함 부통령은 밀사들로부터 우리 반공 포로들의 혈서 탄원서를 받아 읽어보더니 눈물을 흘리며 이들을 데리고 경무대로 올라갔었어요.
이승만 대통령은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즉각 원용덕 헌병 총사령관을 불러 『판문점의 반공 포로들을 한 사람도 송환됨이 없이 석방하도록 계획을 짜라』고 지시하고 밀사들의 신변 보호를 특별히 당부했어요.
이렇게 돼 우리 반공 포로들은 헌병 총사령부의 긴밀한 지령과 지원을 받아가며 공산군의 설득 공세에 대한 임전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헌총의 지령을 통해 들어온 정부의 기본 방침은 『54년1월23일을 기약하고 절대 설득을 거부할 것이며 인도군을 압도하고 대거 탈출하라』는 거였어요.
그러나 이 같은 지령은 밀사 파견을 눈치챈 인도군의 경비 강화로 즉시 중립지대에 전달되질 못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헌총 특공대가 인도군 수송부에 접근하여 수용소 안으로 들어가는 오물 통에 갈기갈기 찢어 넣어 보낸 서울의 일간신문지들을 물에 씻어 붙여 읽어보고서야 알게 됐었습니다.
나는 10월25일 다시 제2차로 이흥수·배영만 두 동지를 헌총사로 밀파했어요.
이흥수 밀사는 지령문을 가지고 귀환하다가 인도군에 붙잡혀 군법회의에 회부되고 말았어요.
이 동지 재판에서는 「체코」「폴란드」가 『그자는 이승만 대통령의 첩자』라고 우기고「스위스」「스웨덴」이 아니라고 주장, 인도는 중립을 지켰어요.
이흥수 밀사는 옷을 벗긴 채 영창에 갇혀 있다가 할복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병원에 입원했는데 54년2월초 간신히 석방돼 나왔어요.
헌총과의 연락 문제는 11월초 ①라디오 ②봉화 ③수용소 병원 한국인 간호원 ④미군 등을 통한 「루트」 확립과 병원 수용소의 중단 교두보가 확보될 때까지는 애로가 많았었습니다.>
▲문중호씨 (당시 중립지대 수용소 반공 청년단 논산 지부장·현 인천 거주·58) <중립지대로 달리는 포로 수송 열차에까지도 철조망과 육중한 자물쇠가 달려 우리 포로들은 하루도 철조망 신세를 면할 날이 없었습니다.
우리 반공 포로들은 장단 역 부근의 비무장지대에 도착한 후 즉시「드럼」을 오려 칼·창 돌을 만들고 깡통에 휘발유를 넣어 사제 폭탄을 제조하는 한편 마룻바닥을 뜯어 국기 게양 대 겸 연락 신호대를 만들어 수용소를 거의 요새화 했어요.
그리고는 반공 청년단 조직을 통해 행동 통일을 기하면서 여차한 경우에는 일전을 불사할 굳은 결의를 다졌어요.
우선 우리 반공 청년단은 인도군의 총격사건에 대한 보복과 포로 관리 태도를 개선시키기 위한 투쟁을 벌였어요.
10월7일 밤 대대적인 인도군 납치 작전을 전개, 6명의 경비병을 각 수용소 지하실에다 감금시켰습니다.
무력을 발동, 수용소 안 수색을 펴겠다는 인도군사령부의 위험에 나체 「데모」로 항거하며 끝까지 버티고 「납치」에 대해서는 시침을 떼고 있었어요.
그리고 나는 배포해주는 NNRC의 설득 세칙 유인물을 받아 불살라버리고 설득 거부 성명서를 인도군 사령부에 보냈습니다.
마침내 「티마야」 장군과 「토로트」 인도 경비군 사령관은 나를 자기 막사로 데려다가 주석을 베풀어주면서 발포사건의 오해를 풀자고 합디다.

<인도 경비병 6명 납치 투쟁도>
「토로트」 소장은 『인도군 6명이 10월1일 죽을 뻔했다』고 말을 꺼내더니 『그들이 아직 죽지는 않았고 위독한 상태』라면서 내 반응을 살피데요. 이는 우리가 납치한 인도군 6명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고 속히 해결하자는 제의임이 분명하더군요.
나는 『미신이지만 우리 한국에는 그 같은 중병은 떡을 만들어 굿을 하고 고사를 지낸다』고 했더니 「토」 장군은 점잖게 『우리는 고사지내는 법을 모르니 반공 포로들이 협조를 좀 해달라』는 거예요.
이튿날은 「티마야」 장군과 다시 만나 내가 보낸 설득 거부 성명을 NNRC에 배부했다는 이야기로 시작돼 인도군 6명의 석방 (?)을 둘러싼 본격적인 협상을 벌였어요. 나는 「티마야」로부터 ⓛ10월1일 사망한 하용연 동지의 합동 위령제 거행 ②인도군은 철조망 50m 밖서 경비할 것 ③자유로운 종교 활동 허용 ④포로 문제를 NNRC서 토의하기 전 반드시 나와 협의할 것 등의 확약을 받고 인도군 6명의 환자 고삿날을 10월11일로 정했습니다.
납치했던 인도군은 중공군 총신 반공 포로들이 쌍십절로 떠들썩한 틈을 이용, 10월10일 미리 눈을 가려 철조망 밖으로 내보내줬어요.
이같이 해서 반공 포로 동지들의 인도군에 대한 감정을 무마하는 한편 설득 장에서 인도가 우리편에 서도록 발목을 잡아 공산 설득 원들과 싸울 수 있는 발판을 굳혀 놓았습니다.

<자신 갖고 스스로 설득 장으로>
10월 중순 우리 논산 지부 A수용소에서 「시베리아」라는 별명을 가진 한 간부가 다른 간부를 공산당이라고 모략하다 탄로돼 북으로 탈출한 사고가 일어나자 생떼를 쓰며 설득을 지연시키고 있던 공산 측이 갑작스레 그 수용소를 지명, 설득을 하겠다고 나섰어요.
출동 명령서를 찢어버리고 설득을 거부했더니「트로트」장군이 무장 인도군을 직접 지휘, 기관총을 들이대고 30분 안에 안 나가면 발사하겠다고 얼러댑디다. 전날 밤 탈출한「스피커」로 우리 쪽을 향해 『수용소를 때려부수고 인도군 보호를 받아 설득 장으로 나오라』고 선동을 해대고 있구요.
우리 반공 포로들이 모두 나체로 뛰어나와 육탄 공세로 대항할 자세를 취하니까 「토」 장군도 지휘봉만 흔들며 물러납디다. 이 사태가 수습된 후 H수용소가 자신을 가지고 자진해서 설득에 나갔습니다.>
◆주요일지 (1953년6월6일∼10일)
※6일 ▲「피의 능선」서 계속 격전 ▲긴급 국무회의, 휴전 대책 논의 ▲「아이젠하워」대통령도 각의 열고 한국 사태 검토, 이 대통령에 친서 발송 ▲「이즈베스티야」지, 휴전 박두 보도
※7일 ▲수풍 발전소 폭격 ▲「미그」기 4대 격추 ▲공산 포로 탈주 타 피살 ▲「클라크」 사령관 내한, 이 대통령과 회담 ▲정부, 도미 예정 장교들에게 출발 중지령 ▲대미중인 백선엽 육군 참모 총장에 긴급 귀국령
※8일 ▲공산 공군기 9대, 서울 야간 공습 ▲휴전 회담, 포로 교환 협정 조인 ▲이 대통령, 휴전 반대 성명 ▲인도 정부, 한국 휴전 이행에 일역 담당 용의 성명
※9일 ▲쌍방 연락 장교, 휴전 협정 세목 토의 ▲「테일러」8군사령관 이대통령과 요담 ▲휴전 반대 시위 격화
※10일 ▲쌍방 참모 장교 비밀회의 ▲「스위스」정부, 한국 휴전 프로 송환 중립국위에 참가 발표
◇알림=6·25때 부산 서면 거제리의 제6포로 수용소에 환자로 수용됐다가 석방된 최근수씨가 같은 수용소에 있었던 「보일러·맨」 김인득씨와 「벼락 방망이」(별명)를 찾고 있으니, 본인들이나 이분들의 소식을 아는 분은 서울 서대문구 영등포 금화「아파트」45동 306호의 최근수씨나 중앙일보 편집국 「민족의 증언」담당자 앞으로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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