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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7)|중립지대 안의 수용소(2)|인도군의 포로관리(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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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53년10월1일과 2일.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 남방에 설치된 반공포로수용소에서 수명의 사망자와 10여명의 부상자를 낸 인도군의 「총격사건」은 또 한번 한국정부와 국민을 격노케 했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은 인도 군의 한국전쟁 포로관리에 커다란 오점을 남겼고 관계당사국사이에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양일간의 형태에 대한 진상발표는 중립국송환위·인도군사령부·「유엔」군 송환단과 반공포로 자신들의 주장이 제각기 약간씩 달랐지만 사건의 결과는 매우 심각하고 불행스러운 것이었다.
인도군이 포로관리에 전혀 경험이 없는데 다가 한국경부나 반공포로들이 처음부터 중립국송환위원회에 대해 비우호적인 감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쌍방간에 충돌의 위험은 있었다.
이같은 감정은 반공프로들을 인계 받는 순간부터 제40수용소장을 비롯한 인도군 소령 한 명이 북으로의 송환을 권장하는 친공적인 언사를 자행함으로써 더욱 악화됐다.

<총격사건에 한국정부 초강경>
10월초 「체코」 「폴란드」를 선두로 한 NNRC대표들로 구성된 수용소 시찰단의 접근을 반공포로들이 극력 반대하고 나서자 인도 군들은 이를 제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포」라는 최후의 경비권을 발동, 마침내 유혈의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다.
인도군은 프로들이 수용돼있는 비무장중립지대에서 무기를 사용함으로써 『부득이한 조치였다』는 그들 해명에도 불구하고 관리의 미숙함을 드러냈고 급기야는 「만행」이라는 한국정부와 반공포로들의 호된 비난을 받게 되었다. 한국 정부는 이 사건이 나자 즉각 『인도가 중립국이란 가장 하에 공산주의자로서 행동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솔직하게 중공 및 북한에 군대를 파견해서 우리와 싸워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강경한 성명을 발표하고 『만행에 시정이 없을 때는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인도 군을 축출해버리겠다』고 경고했다.
한편 국회도 특별조사단을 구성, 사건진상 조사에 나섰고 또 전국 각지에서는 『인도군의 포로살해와 강제설득』을 규탄하는 시민궐기 대회가 열렸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당시 한국경부나 반공포로들이 인도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은데다가 6·25라는 이념 전에서 생긴 사상포로들에 대한 인도 군의 이해부족 등이 겹쳐 폭발한 비극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면 인도군의 프로관리 상황을 당시 중립지대 수용소에 수용됐던 반공포로들로부터 들어보겠다.
▲한은송씨(당시 중립지대 제40수용소 반공포로=현 대한반공청년회장·51)<6·18석방 때 탈출에 실패, 부산·논산·부산 제14야전 병원 등에 수용돼 있던 한국인 반공포로 7천8백90명과 중공군출신 송환거부 포로 약1만5천명은 53년9월 중순부터 얼마 전 북송포로들을 실어 날랐던 바로 그 군용열차를 타고 판문점부근의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 남쪽에 신설된 수용소로 들어갔습니다.
90일간의 설득기간 동안 포로관리권을 「유엔」군으로부터 이양 받은 인도 군은 우리반공포로들을 세 지역에 나누어 5백명 단위로 분산수용 합디다.
인도군은 처음엔 우리들에게 친절한듯 하더니 점점 친공적인 냄새를 풍기며 반공포로들을 억압하기 시작했어요.

<국회조사단서 진상 파헤쳐>
5개 중립국송환위 의장국이며 포로관리를 맡은 인도가 최대한의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은 했겠지만 우리 반공포로들이 볼 때 그들의 거동은 몹시 불만스러웠어요.
특히 몇몇 몰지각한 인도군은 공산주의를 찬양하면서 질환을 권유하는가 하면 어떤 장교는 일본말을 사용, 협박적인 언사로 북으로의 귀환을 강권(?)하는 사례까지 있었어요.
자기목숨을 걸고 「반공」투쟁을 해온 우리 포로들이 이 같은 인도군의 태도에 분격한 건 당연한 일이었지요.
10월초 반공포로에 대한 인도군의 총격사건은 국내 조야를 격노케 했고 결과적으로 우리들의 반공투쟁을 더욱 자극시킨 계기가 됐어요.
「유엔」군 송환단(UNCREG) 참모장 「라이크」대령이 말했던 것처럼 인도관리군은 포로를 다루는데 거의 백지상태 더군요.
정일형·박영출·김문용 의원 등 국방·외무분과 위원들로 구성된 국회사건진상 조사단은 문산까지 들어와 UNCREG단장 「햄블린」준장을 통해 인도대표 「티마야」 중장과의 회견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일도 있어요.
그래도 국회조사단은 보도와 출입이 철저히 제한된 인도군 관리지역 안에서 일어난 사건의 진상을 파헤쳤어요.
석방돼 나온 후 53년10월20일의 제16회 제60차 임시국회 속기록을 열람해 보니 당시 인도군의 발포사건에 대한 국회조사단의 보고가 다음과 같이 소상히 기록돼있습디다.

<반공청년단서 상호 연락 취해>
『△반공포로가 도착하던 날(9월18일)인도군 모소령은 일어로 노골적인 공갈과 위협을 가미한 강제송환을 획책한 사실.
△제40수용소전 소장 인도군 준위는 북한이 제일이라고 선전하면서 북송을 선동.
△10월1일 하오 NNRC적대국 대표를 발견, 시위하는 반공포로들에게 사전통고 없이 난사하여 2명의 사망자와 10여명의 부상자를 낸 사실.
△10월2일 퇴원중인 환자포로의 요구를 묵살하고 또 발포, 한명의 사망자와 수명의 부상자를 냈고, 그 포로를 결박하여 야만적이며 비인도적인 방법으로 영창에 집어넣는 만행을 감행한 사실.』 물론 10월17일 NNRC가 발표한 사건발생의 원인 해명은 『프로들의 투석과 탈출기도 때문에 인도 군은 부득이 발포했다』는 것으로 국회조사단과는 상반된 주장이었으나 인도군은 그들이 사살한 포로시체를 거두어 장례까지 치러준 것으로 보아 사건 책임은 전적으로 시인한 셈이었지요.>
▲김문주씨(당시 중립지대병원 반공포로=현1급 원호대상자·서울거주·41)

<부산서면 제14야전병원에 수용돼 있던 우리 1천여명의 환자포로들은 추석이 막 지난 9월 중순 비무장지대 인도군 관리하에 들어갔습니다.
판문점을 향한 군용열차에 오르자 미군들은 우리포로들에게 백일짜리 달력과 색안경 하나씩을 줍디다.
달력은 90일간의 설득기간을 한장씩 찢어 내면서 기다리고 색안경은 수용소로 들어갈 때 공산군들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쓰라는 거였어요.
이는 북한 공산군들이 송환을 거부하는 우리 반공포로들의 얼굴을 알게되면 고향의 가족들을 박해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환자프로들은 부산에 있을 때 두번의 탈출소동을 벌여 한번은 개울 쪽으로 굴까지 다 파놓고 집단탈출 하려다가 미군한테 발각돼 아주 혼난 일이 있어요. 미군들의 기합으로 치료중인 외과 중환자 포로들의 팔다리가 모두 다시 부러져버려 미군군의관들이 아우성을 쳤고 끝내는 미8군의 조사로 경비대장이 경질되기까지 했어요.
인도군에 인계된 우리반공포로들은 부산·논산·병원출신별로 3개 지역에 분산수용 돼 반공청년단 조직도 자연히 3개 지부로 나뉘어 상호연락을 취하며 활약했어요. 내가 속해있던 병원 지부에는 4개 수용소가 있었는데 철조망 안에는 미군군의관과 한국인간호원만의 출입이 허용됐고 수용소추위는 인도 군이 경비를 하고 있었어요.
10월초의 인도군 발포사건도 우리 병원 수용소에서 발단된 거예요.
10월1일 아침 NNRC 「체코」와 「폴란드」대표들이 환자포로들의 급식상황을 조사한다고 병원수용소에 들어오는데 우리 반공프로들이 이들 친공중립국 대표들을 그대로 받아들일 리가 있겠어요.
돌멩이를 던져 접근을 방해하는 한편 몇 동지가 감시 탑으로 뛰어올라가 인근 수용소에 신호를 했어요.
반공포로 수용소들은 서로 거리를 멀리 떼어놓아 육성으로는 연락이 안돼 수용소간의 내통수단으로 감시 탑을 이용 적·백기를 들어 신호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날은 신호가 잘못 전달돼 인근수용소 동지들이 우리병원에 위태로운 일이 일어난 줄로 알고 철조망들을 뛰어넘어 지원하러 나왔어요.
그러자 탈출을 기도하는 줄로 착각한 인도군은 당황한 나머지 계포를 감행, 유혈의 사태를 빚고 말았어요.
그후 우리수용소에서는 정문을 경비중인 인도군 경비병을 납치, 또 한번 큰 소동을 벌인일이 있습니다. 거제도에서 친공 포로들이 수용소장 「도드」회장을 납치한 것과 비슷한 경우였지요.
원래 철조망 밖은 인도군이 총을 들고 경비하고 수용소 안은 포로들이 자체경비를 하도록 돼 있었어요. 하루는 인도군 철조망 정문 보초 명이 우리 경비 모로 한테 일본말로 『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느냐. 고향의 부모형제가 보고 싶지 않느냐. 북으로 가겠다면 정문을 열어주겠다』면서 북송을 권유했어요.

<대우 나쁘면 소란 피우기도>
경비포로 동지가 달려 들어와 이 말을 전하자 우리 수용소 안 반공프로들은 그 인도 병사를 납치, 혼을 내주기로 모의하고 힘이 센 경환자들로 특공대(?)를 편성했어요.
이들 대원들이나가 이북으로 가려고 왔다니까 인도군 경비병은 순진하게 문을 열어줬어요. 이 순간 한꺼번에 덮쳐서 그를 수용소 안으로 끌고 들어와 총을 뺏고 「팬츠」만 입혀 놓은 채 실컷 놀려댔습니다. 인도군 측에서는 「스피커」로 『짤리 내보내라』고 아우성을 칩디다.
안 내보내고 버티니까 나중에는 「티마야」중장이 직접 나타나 정식 사과까지 하더군요. 그래서 우리는 머리에 쓰고있던 그의 「터번」만을 뺏고 풀어줬습니다.
이같은 소동이 있고 난후의 며칠동안은 우리 포로들에 대한 대우가 무척 좋아지는게 상례였어요. 그래서 우리들은 또 대우가 좀 나빠지면 의식적으로 소란을 피우기도 했습니다. 또 우리에게는 1백20일만 지나면 「석방」이라는 보장이 있어 모두가 자신만만했어요.>
◆주요일지(1953년5월25일∼28일)
※25일▲휴전회담 31일까지 휴회결정 ▲최덕신 한국대표는 회의불참 ▲「네루」수상, 공산 측의 휴전제안지지 천명
※26일▲「미그」기 12대 격추 ▲농촌의 식량난 심각 ▲「아」 대통령, 포로 강송 않는다고 확약
※27일▲미군기, 옹진반도일대 맹폭
※28일▲한국군, 중동부서 연대 병력의 적 공격 격퇴 ▲국회대표 「해리슨」 대표와 회견코 「유엔」군측의 신제안공개 요청 ▲중석불사건 전피고에 무죄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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