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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0억원 잭팟' 추신수 부인 하원미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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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그놈아 이름이 뭐라꼬? 추신수라꼬?”

 부산에서 대학에 다니던 하원미(31)씨는 만 스무 살이던 2002년 12월 어느 날 소개팅에 나갔다. 상대가 동갑내기 야구선수라는데 하씨에겐 낯선 이름이었다. 별생각 없이 얘기했더니 아버지가 “추신수가 대단한 친구라 카던데. 그런데 갸가 니하고 소개팅을 했따꼬?”라고 되물었다. 추신수는 이름만으로 예비 장인의 마음을 얻었다. 지역 최고의 유망주, 지독한 악바리, 속 깊은 부산남자 추신수를 하씨는 전혀 알지 못했다. 만나자마자 불꽃이 튀었다. 하씨는 “처음 만난 날부터 우린 불같은 사랑을 했다. 한 달 내내 붙어다녔다”고 추억했다. 귀한 딸이 통금시간 9시를 넘겨 밤늦게 들어와도, 아침부터 남자친구를 만나러 가도 부모는 눈감아 줬다. 추신수를 믿은 하씨 부모는 이미 결혼을 허락했다.

소개팅서 서로 첫눈에 반해

하원미씨가 2011년 케이블채널 스토리온의 ‘수퍼 맘 다이어리’에 출연했을 때 모습. [사진 스토리온]

 마이너리거였던 추신수가 미국으로 건너간 뒤 둘은 밤새 전화통을 붙들고 살았다. 스물한 살, 사랑의 열병은 너무 깊었다. 보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매일 울먹이는 추신수를 만나기 위해 하씨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한두 달만 있을 예정이었지만 아이(무빈·8)가 생기는 바람에 돌아오지 못했다. 연극영화학과 여대생의 꿈은 거기서 멈췄다. 그리고 하씨는 미국에서 새로운 꿈을 심고 키워냈다. 추신수의 성공, 추신수 가족의 행복이 그녀의 꿈이 됐다.

 결혼식을 올리진 못했지만 둘은 10년째 부부로 살고 있다. 추신수는 아내 손을 잡고 자주 말했다.

 “조금만 더 고생해라. 이제 다 왔데이. 꼭 보상받을 끼다.”

 “누가 보상 받을라꼬 고생하나? 내는 괘안타. 지금도 좋다.”

 지난 22일(한국시간) 추신수는 미국 프로야구 텍사스 레인저스와 7년 총액 1억3000만 달러(약 1380억원)에 계약했다. 아시아 선수 최초로 계약 총액 1억 달러를 돌파했고, 메이저리그를 통틀어도 역대 27위(외야수 역대 6위)에 해당하는 특급 대우를 받았다. 추신수의 ‘아메리칸 드림’은 혼자 이뤄낸 게 아니다. 추신수는 “아내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과거 난 명예를 위해 야구를 했지만 이젠 아내와 내 아이들을 위해 뛴다”고 말했다.

 추신수는 가난한 집 장남이다. 월급 1000~2000달러를 받았던 마이너리그 시절에도 그랬고,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메이저리그 주전 선수가 된 2008년 전까지 끼니 걱정을 할 만큼 형편이 어려웠다. 추신수는 “원미가 무빈이 임신했을 때 먹고 싶은 걸 제대로 사준 적이 없다. 그게 지금까지 가장 미안한 일”이라고 떠올렸다.

 마이너리그 팀은 선수에게 밀머니(식대) 5~6달러를 매일 준다. 햄버거 하나 사먹으면 남는 게 없다. 먹성 좋은 추신수는 레스토랑에서 공짜로 주는 빵조각 몇 개를 챙겨와 모텔에서 씹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그는 자신보다 더 고생하는 가족을 위해 독한 마음을 먹었다.

 원정경기에서 돌아와도 추신수는 편히 발 뻗고 잠들지 못했다. 월 700달러짜리 월셋집에서 다른 선수 부부와 화장실과 부엌을 함께 썼다. 하씨는 “다들 20대 초반 남녀였다. 옆방 커플이 부부싸움이라도 하면 밤새 한숨도 못 잤다”며 “지금까지 함께 사는 커플은 많지 않다. 남편이 메이저리거가 되고 헤어지지 않은 우리 부부를 가장 부러워한다”고 했다.

추신수-하원미 부부가 2005년 메이저리그 첫 안타를 때린 기념으로 첫아들 무빈과 작은 파티를 열었다. [중앙포토]

 하씨는 만능 주부이자 매니저다. 추신수를 위해 한국에서 스포츠마사지를 배워 왔다. 남편이 집에 있는 날이면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마사지를 해준다. 추신수는 “손에 기운도 없으면서 그만해라”라고 말하지만 아내의 정성을 느끼며 스르르 잠든다. 하씨는 간단한 농작물을 직접 키워 남편과 아이들에게 먹이는 요리사이기도 하다. 메이저리거가 된 후 추신수는 최고급 호텔 음식을 마음껏 먹지만 애리조나 집에서만큼은 아내의 정성과 손맛이 담긴 식탁을 받는다.

 평범한 여대생은 강한 아내이자 엄마로 변해갔다. 2009년 둘째 아들 건우(3)가 태어났을 때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했다. 혼자 병원으로 차를 몰고 가 아이를 낳은 그는 “집에 다섯 살 아이가 혼자 있다. 내가 돌봐야 한다”고 의사에게 우겨 출산 24시간 만에 퇴원했다. 갓난아이를 안고 다시 운전해 집으로 돌아와 두 아이를 돌본 일화는 야구인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아들 무빈과 건우, 딸 소희(가운데)가 텍사스 유니폼을 입고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중앙포토]

 추신수는 “스물한 살 때 나 하나만 믿고 미국으로 건너온 여자다. 가족이나 친구 하나 없고, 심지어 시즌 때는 나도 집을 비우는 상황에서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며 “야구를 선택한 것보다 아내를 선택한 게 내겐 최고의 행운이다. 아내 얘기를 하면 다들 팔불출 같다고 말리지만 아내 얘기 없이 내 얘기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아마추어 시절 ‘야구 천재’란 평가를 들었던 수많은 유망주가 미국땅에서 소리 없이 사라졌다. 1994년 박찬호(40·은퇴)를 시작으로 100명 가까운 선수가 태평양을 건넜지만 메이저리그 문턱을 넘은 선수는 10명도 되지 않는다. 실력뿐 아니라 언어·문화의 장벽을 넘지 못한 채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올 가능성이 훨씬 높다.

 해외에서 성공하는 것 못지않게 결혼하기도 어렵다. 박찬호나 박지성(32·에인트호번) 등 20대 나이에 크게 성공한 스포츠 스타들은 결혼이 늦어지는 게 보통이다. 유혹이 많을 뿐 아니라 남자가 아닌 자신의 성공을 원하는 여자를 경계하기 때문이다. 추신수는 지인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원미는 내가 아무것도 없을 때 나 하나만 믿고 좋아한 사람이다. 어릴 때 아내를 만나지 않았다면 난 지금도 결혼하지 못했을 거다.”

"아내 만난 건 인생 최고의 행운”

 추신수를 키운 건 독한 사람들이었다. 아버지 추소민(62)씨는 아들을 안아준 적이 없다. 한 살 갓 넘은 아들의 키를 키우고 힘을 단련시키겠다며 아버지 팔에 매달았다. 야구를 시킨 뒤에는 하체를 강화하기 위해 납덩이를 달고 다니게 했다.

 은사인 고(故) 조성옥 부산고 감독은 아버지보다 더 엄했다. 또래들보다 훨씬 야구를 잘했던 추신수가 더 강인해지고 겸손해지도록 독하게 훈련을 시켰다. 죽을 만큼 뛰다가 구토를 한 게 여러 번이었다. 토하면서도 뜀박질을 멈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랬던 추신수도 약해질 때가 있었다. 2007년 9월 왼 팔꿈치 인대접합 수술을 받고 나서였다. 이제 막 메이저리그에서 자리를 잡으려 했는데 야구인생 최악의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추신수는 “이제 한국에 돌아갈까”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손에 잡히는 듯했던 ‘아메리칸 드림’이 다시 멀어지자 기운이 빠진 것이다. 아내와 아들을 생각하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추신수 브랜드라면 프로야구에서 연간 10억원 정도는 벌 수 있었다.

 한 번도 남편의 말을 거역한 적이 없는 아내가 말했다. “가족이 고생하는 거 같아서 힘드나? 그라믄, 내가 무빈이 데리고 한국으로 들어갈게. 그러면 당신이 편하게 야구에만 전념할 거가? 우리는 괜찮으니까 걱정 마라. 남자가 꿈을 가졌으면 끝까지 해봐야 될 거 아이가?” 그날만큼은 아내가 아버지나 감독보다 더 독했다. 둘은 서로를 껴안고 밤새 울었다.

 다행히 수술도 재활훈련도 잘 끝났다. 추신수는 2009, 2010년 2년 연속 3할타율·20홈런·20도루를 기록했다. 홈런왕에 오르거나 올스타에 뽑힐 정도는 아니지만 팀에 꼭 필요한 선수로 자리 잡았다. 현대 야구에서 희귀해진 5툴(타격의 정확성·파워·수비·송구·주루 능력) 플레이어로 인정받은 덕분이다. 수백만 달러의 연봉을 받기 시작했고 애리조나의 저택도 구입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3홈런·10타점을 올리며 한국 대표팀의 금메달을 이끈 덕분에 병역면제 혜택도 받았다.

 끝난 것 같았던 고난은 또 툭 튀어나왔다. 2011년 5월 음주운전 파문으로 구설에 올랐다. 사고를 친 후 그라운드에 복귀하자마자 샌프란시스코 조너선 산체스의 투구에 왼 엄지를 맞고 골절상을 입었다. “야구를 그만둘 생각도 했다”는 추신수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 역시 아내였다. 하씨는 원망 한마디 하지 않고 남편을 응원했다.

 자유계약선수(FA) 자격 획득을 앞둔 올 시즌 추신수는 신시내티 레즈에서 뛰며 타율 0.285·21홈런·20도루·107득점·112볼넷을 기록했다. 특히 내셔널리그 2위에 랭크된 출루율(0.423)이 추신수의 가치를 높여줬다. 그의 출루율은 안타와 볼넷뿐 아니라 리그 최다를 기록한 사구(몸 맞는 볼·26개) 덕분에 만들어졌다. 사구를 한 방 맞으면 60~80t의 충격을 받지만 추신수는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고통을 받아냈다. 1억3000만 달러의 계약은 몸이 부서질 것 같은 통증을 참아낸 열매다.

 추신수가 클리블랜드에서 뛸 때 현지 팬들은 그에게 ‘추추트레인(Choo Choo Train)’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기적소리와 같은 그의 성(姓)을 딴 것이기도 하고 그의 질주가 힘차게 달리는 기관차 같기도 해서다.

 추신수는 기차처럼 강하고 튼튼하다. 뒤로 갈 줄 모르고 길을 따라 달려 왔다. 추신수는 “난 배리 본즈나 앨버트 푸홀스 같은 특급 선수가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래도 메이저리그 팬들에게 추신수는 참 성실했다는 기억은 남기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비행기처럼 빠르지 못하고, 우주선처럼 환상적이지 않지만 묵묵히 달린 끝에 추신수는 성공의 길로 들어섰다. ‘추추트레인’의 철로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아내다. 추신수가 앞만 보고 달릴 수 있도록 삶의 무게를 대신 지탱해준 ‘내조의 여왕’이다.

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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