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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8)|휴전회담(후반부)(23)|한미관계의 긴장(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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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아이젠하워」대통령은 6·18반공포로석방직후 이 대통령에게 전문「메시지」로 항의하는 한편 직접 특사를 서울로 파견하기로 하였다. 원래 「아이크」행정부는 6·18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한국측의 휴전반대입장을 무마하려고 이 대통령에게 방미를 초청했으나 그는 이 중대시기에 한국을 떠날 수 없다고 사양하면서 오히려 「덜레스」대신에 「월터·로버트슨」극동담당차관보를 한국에 보내기로 했는데 6·18사태가 터지자 그를 그대로 대통령특사자격을 주어 서울로 급행시켰다.
「로버트슨」특사는 서울도착에 앞서 동경에서 「클라크」「유엔」군 사령관, 「로버트머피」주일 미 대사, 「에리스·브릭스」주한 미 대사와 이른바 4자 전략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내린 결론은 결국 공산측은 여러 여건으로 보아 휴전을 바라기 때문에 「유엔」군 측은 협정조인을 위해 「전속전진」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공산측은 석방포로의 재수용을 고집하지 않을 것이며, 잔존포로를 비무장지대에 이송하는데도 동의하리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이제 가장 시급한 당면문제는 이 대통령의 반대를 누그러뜨리는 것이라는데 의견을 모았다. 이때 이 4자 회담이 어떤 정보에 바탕을 두고 이런 낙관적인 정세평가를 했는지 알 수 없으나, 아무튼 그 분석은 나중에 적중했음이 드러났다.

<미와 담판에 이 박사 생애 걸어>
동경회담을 마친 「로버트슨」특사는 「머피」대사를 고문으로 대동하고 6월25일 서울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며칠이면, 이 대통령의 고집을 꺾을 수 있다고 얕잡아 보았지만, 이것은 엄청난 오산임을 곧 알게 되었다.
「소 휴전회담」이라고 부른 서울회담은 판문점회담 못지 않게 난항을 거듭했다. 용광로처럼 들끓는 휴전반대의 아우성을 배경으로 삼은 이 대통령은 우방이지만, 이제는 이해가 같지 않은 미국과의 이 「담판」에 생애의 모든 것을 걸었다.
먼저 「로버트슨」특사가 서울에 도착했을 때의 서울에서의 휴전반대 「데모」광경을 한 외국기록에서 인용해 보겠다.
이 「데모」에는 각계각층의 온 국민이 호응했는데 그 중에도 진명여중을 비롯한 어린 여학생들이 벌인 격렬한 「데모」는 외국에도 널리 소개되어 깊은 감명을 주었다.
『「로버트슨」차관보 일행은 6·25 3주년기념일에 서울에 도착하여 즉시 이 대통령과의 회담에 들어갔다. 주로 영문으로 된 휴전반대 「슬로건」의 깃발이 주요 도로와 중앙청 건물 위에 걸쳐있고 시위군중들은 시가를 누비며 몰려다니고 있었다. 「데모」군중이 가장 많이 그리고 소리높이 부르짖은 구호는 「북진」이었다. 그들은 시가를 행진하거나 달음질 칠 때 쉴새없이 이 「북진」구호를 부르짖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들리는 이 구호는 마침내 서울시 전체를 산울림과도 같은 함성으로 변모시켰다.
질서정연하고 자연발생적인 이 시위에는 여학생들도 한목 끼여 구호를 외치면서 「유엔」군 기자숙소 철조망에 몸을 던졌다. 어느 날 여학생들은 지금껏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가장 기이하면서도 애절한 「데모」를 전개하였다. 학생들은 처음에는 잠자코 중앙청 앞을 지나 거기서 얼마 안 떨어져 있는 「유엔」군 기자단숙소인 내자「호텔」을 향해 행진하였다. 학생들은 그 「호텔」앞 지저분한 교차점에 와서 발을 멈추더니 호각소리의 신호와 함께 흙탕물 속에 주저앉아 일제히 울기 시작했다. 울음소리는 놀라운 군중심리의 효과를 나타내면서 점점 커져갔고, 이렇게 한 시간 반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얼마 안되던 눈물방울이 조금 있으니까 통곡으로 변해 모든 학생들 뺨에서는 굵은 눈물줄기가 흐르기 시작하였다. 그날의 「데모」구호는 「한국을 팔아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거의 모든 시위행진은 기자단 숙소 앞에서 끝났다. 그렇게 함으로써 「데모」기사와 사진이 전세계에 전해지리라는 것을 한국인들은 알고 있었다.
외국기자들은 자기 숙소 앞에서 일어난 일들을 취재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한국정부는 국민들이 통일이외는 어떤 것도 만족치 않는다는 것을 세계에 알리려고 한 것이다.』
「월터·로버트슨」특사는 6월25일부터 서울을 떠나는 7월12일까지 18일 동안 거의 매일같이 이 대통령과 만났는데 회담의 주도권은 완전히 이 대통령 손아귀에 있었다. 기록을 보면 연이어 제기되는 이 대통령의 새로운 요구를 미국이 수동적인 입장에서 받아들였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 대통령은 자기 요구조건을 미국 측이 구두로 동의하면 다시 문서로 기록할 것을 주장했다. 「워싱턴」에서 그렇게 하면 또 새로운 요구조건을 덧붙여 「로버트슨」특사가 놀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 회담이 얼마나 어려운 고비를 몇 번 꺾었는가는 다음의 53년7월5일자 서울발AP통신보도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휴전반대시위 거리 누비고>
『이 대통령은 휴전조인 후 90일 안에 제안되어 있는 정치회의에서 한국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한다면, 미국은 한국통일을 위해 다시 무기를 들 것을 약속해야 한다는 그의 요구를 3일 회담에서도 강경히 주장하였다. 고위소식통이 3일 전한 바에 의하면 이 대통령은 이날의 「로버트슨」특사와의 제7차 회담에서도 자기요구가 관찰되지 않으면 휴전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미국이 그런 약속을 성문화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워싱턴」측은 상원비준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수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쌍방간에 합의가능성이 전혀 없다면 3일의 7차 회의가 마지막 모임이 될지도 모른다.
「로버트슨」특사는 경무대를 나오면서 기자들에게 우리의 토의는 계속되고 있으며 다시 이 대통령을 만나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믿을만한 소식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미 상원이 비준한 후 조인하게 될 한미상호방위협정의 토의를 「로버트슨」특사는 제안했으나 이 대통령은 동조약내용이 만족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거부했다고 한다.

<클라크, 변 외무와 언쟁까지>
정치회의가 개최되어 90일이 지나면, 미국은 곧 퇴장하여 공격을 재개해야한다는 이 대통령의 요구가 수정되든가, 또는 한국통일에 대한 어떤 결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서울회담은 며칠 안으로 결렬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예언할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이 회담의 미국 측 주역은 「로버트슨」특사였지만, 「클라크」사령관도 때때로 동경에서 와 합석했는데 한번은 변영태 외무와 심한 언쟁까지 벌였다는 사실이 장군의 저서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있다. 그만큼 회담분위기는 삼엄했던 것이다.
『나는 몇 차례, 이·「로버트슨」회담에 공석 했지만 곧 동경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어느 회담 때인가, 나는 송환 불원 포로들의 귀국을 권고하기 위해 공산측 해설요원들이 불법감금, 또는 공갈의 수단을 쓰는 것을 미국은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랬더니 변 장관이 내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며 의심을 하기에 「장관님, 이것은 본국정부의 언질을 내가 대변하고 있다는 것을 확언하는 바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변 장군은 「장군의 본국정부 언질은 과거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때로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읍니다」라고 비꼬는 게 아닌가. 이것은 지금껏 변 장관의 입에서 나온 말 중에서 가장 공공연한 모욕이었으므로 도저히 그대로 흘려 버릴 수가 없었다.
나는 「이곳에 앉아서 우리 나라를 모욕하는 그런 말을 듣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대들었다. 그랬더니 변 장관은 잠자코 있는데 이 대통령이 옆에서 「여러분 논쟁이랑 맙시다. 변 장관이 미국의 성실성을 의심했다고는 믿지 않아요」라고 화해를 붙였다. 그래서 입씨름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소도 이박사의 대미강경 보도>
서울의 「소 휴전회담」에 대해 물론 공산측도 지대한 관심을 갖고 주시했는데 회담이 지지부진하자 초조감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스탈린」사후 미국과의 평화공존추구의 시험대로 한국휴전을 은근히 바라고 있던 소련의 안타까움과 실망은 다음의 7월16일자 「소비에트·뉴스」에 잘 집약돼 있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서 지난 3년 동안은 도대체 이승만이란 이름을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이 3년 동안 남한의 모든 문제는 미군사령관에 의해서만 지시되고 이승만은 부산 한 모퉁이의 미군 뒤뜰 안에 안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이승만은 너무도 강대·강력하기 때문에 「유엔」군 사령관이나 미국 대통령도, 그리고 미국의회도 그와 겨눌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꼴불견의 연극이 또 어디 있겠는가.』
공산측 신문논조이지만 미국이 이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얼마나 애를 먹었는가를 잘 표현한 것이리라 하겠다.
◇주요일지(1953년5월1일∼4일)
※1일 ▲미 전함「뉴저지」호 원산포격 ▲휴전회담 포로관리할 중립국지명문제로 논쟁 ▲북한, 억류중인 7명의 미국인 석방 ▲「프라우다」지, 평화공존역설
※2일▲미「제트」기, 평양방송국 폭격 ▲호군, 「라오스」왕도에 접근 ▲「덜레스」장관, 「라오스」방어의 불군에 군원제공언명, 우선 50대의 수송기 대여
※3일 ▲「유엔」군측, 6천6백70명의 공산군 상병포로인수완료 ▲일부 미 상원의원들 동남아파병건의
4일 ▲휴전회담 「유엔」군 측은 중립국으로 「파키스탄」지명 ▲「네루」수상암살음모 적발 ▲「처칠」수상, 「라오스」사태에 중대관심 표명

<알림>「민족의 증언」문의나 연락사항은 전화 28-8211(교환)의 74번, 일요일과 야간은 94-3415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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