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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0)휴전회담(후반부)(22)|한미관계의 긴장(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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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포로관리의 직접 책임자인 「마크·W·클라크」「유엔」군 총사령관도 「아이젠하워」대통령에 이어 이승만대통령에게 6·18조치를 항의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앞서도 지적했지만 「아이크」행정부의 정책수립자들과는 달리 늘 이 대통령 입장에 동정적이었던 「클라크」사령관도 포로의 일방적 석방이란 엄청난 사태에 대해서는 몹시 분노했다는 것이 그의 서한에 역력히 나타나 있다.
『…본관은 각하가 일방적으로 각하 자신이 행한 약속을 폐기한데 대해 심심한 충격을 받았읍니다. 최근 수주일 동안 누차에 걸쳐 각하는 「브릭스」대사와 본인에게 「유엔」군 사령관 휘하에 있는 한국군에 관한 어떤 행동도 완전하고도 솔직한 사전협의가 있기 전에는 일방적으로 취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직접 주셨읍니다.
각하의 이번 행동은 이러한 보장을 분명히 위반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 대통령에 대한 미국관리로서의 가장 강력한 공식 항의였다. 「아이젠하워」대통령은 자기가 이 대통령에게 보낸 항의서한은 공개 못하게 했지만, 「클라크」장군의 항의「메시지」는 본인의 의사에 반해 공표토록 지시했다.

<「클라크」, 강경하게 공식항의>
한편 「워싱턴」이나 동경 못지 않게 허를 찔려 당황한 공산측은 처음 며칠동안은 미국이 한국과 공모했다는 비난으로 탈출구를 찾으려하였다. 다시 말해 이 대통령의 반공포로석방은 미국과의 공모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비난이기에 「클라크」사령관은 더욱 해명에 진땀을 빼야했다. 이밖에도 공산측은 6·18석방조치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집요한 질문공세를 폄으로써 「클라크」사령관을 괴롭혔다.
▲「유엔」군 사령부는 한국 정부와 한국군을 통제할 수 있는가?
▲한국 휴전은 대한민국에도 적용되는가?
▲한국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면, 한국이 휴전협정을 준수하리라는 어떤 보장이 있는가?
▲「유엔」군 사령부는 탈출한 포로들을 다시 체포할 것인가?
모두가 다 가시 돋친 질문으로 「클라크」장군은 해답을 「워싱턴」에 구했던 바 자신의 판단에 따라 회답하라는 회보였다. 이에 따라 조인이 눈앞에 있던 휴전회담도 자연히 무기연기 될 수밖에 없었다. 「클라크」는 이 대통령으로부터 휴전을 방해치 않겠다는 굳은 약속을 얻기 전에는 회담재개가 소용없기 때문에 다시 서울로 비행하기로 했다. 포로석방 4일째인 6월22일에 아직 충격과 분노로 신경이 날카로운 「클라크」장군은 또다시 이 대통령과 만나려고 내키지 않은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때의 정경이 「클라크」저서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있다.
『세계의 비판이 이 대통령에게 작용한 것이 분명했다. 내가 포로탈출 4일 후에 방문했을 때 그는 상당히 흥분상태에 있어 보였다. 그는 나에 대해 평상시보다도 좀더 반가이 맞이하는 것 같았고, 내가 보낸 강경한 항의서한 내용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왜 각하는 저에게 하신 약속을 어기고 사전통고도 없이 한국군을 저의 휘하로부터 빼내 포로를 석방하였읍니까』하고 따졌다.
이 대통령은 덤덤한 표정을 지으면서 『왜 내가 미리 통고를 못하였는가는 자명한 일이 아니오』라고 대답하였다.
물론 미리 알리면 내가 적절한 포로탈출 저지책을 강구했을 게 아니냐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자기가 아직도 미국과 보조를 같이하여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라는 점을 「아이젠하워」대통령에게 전달해달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이번 휴전과 타협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을 하고 우리가 한국에서 중공군을 무력으로 추출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나는 그런 문제는 휴전 후에 개최될 정치회의에서 다룰 것이라고 말하였다.
한편 내가 서울에 갈 때까지도 한국군헌병총사령관 원용덕중장은 미군경비병휘하에 들어온 잔존 반공포로들도 모두 석방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나는 이 대통령에게 『저는 포로수용소에서 한국군과 미군사이에 충돌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는데 그런 일이 생겨서는 절대 안되겠읍니다』라고 말하였다.
이 대통령은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힘쓰겠다』고 약속했는데 그후 이 약속은 지켜졌다.

<한·미군 충돌 없도록 약속>
나는 정치회의 개최까지는 일정한 시한이 있어야 한다는 대통령의견에 동의하였지만 이 문제는 내 권한 밖이기 때문에 어떤 언질을 줄 수는 없었다. 이 대통령은 정치회담의 시한을 90일로 정하고 그동안에 구체적인 성과가 없을 때에는 휴전을 끝장낼 것을 미국에 요구했다.
이렇게 될 경우 미국이 또 한국과 함께 싸우든지 아니면 한반도에서 철수하든지 하는 것은 의당 「워싱턴」에서 결정할 문제라고 이 대통령은 말하였다. 그 다음 대통령은 제안된 한·미 방위조약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물론 한국이 침략자가 되는 경우 미국은 한국에서 원조의 손을 뻗치지 못한다는 것을 자기도 잘 알고 있노라고 말하였다. 여기에 있어서의 언외의 뜻은 미국이 그의 우방한국을 공산주의들에 대한 침략자라고 부를만한 증거는 아무 것도 없지 않으냐는 뜻임이 분명했다.
즉 공산주의자들은 한국에서 선수를 걸어온 침략자라는 것은 이미 판명된 일이다. 또 어떤 사정이 있던 한국군이 홀로 싸우다가 정말 난경에 처하면 결국 미국은 구원의 손을 내밀 거라고 이 대통령은 계산했을 것이다.
나는 한국군이 어떤 독자적 행동도 취할 능력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나의 판단으로서는 한국군은 중공군을 북한에서 몰아내는 공세를 취하는 문제는 고사하고라도 중공군공격을 단독으로 막아낼 수도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 대통령에게 미국원조로 한국군을 증강, 훈련하기 위한 시간여유를 휴전에서 얻을 수 있다는 이점도 설명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장차의 공산침략에 한층 더 유리하게 대비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미국무관 납득시키기에 부심>
이 대통령의 이야기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정부가 국토를 분단하는데 동의하는 휴전협정에 조인할 수는 없지만 그 협정을 지지할 수는 있다는 대목이었다. 나는 이 대통령으로부터는 이 정도의 지지만 얻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물러나오기 직전에 나는 인도군 및 공산측해설요원이 한국후방지역 입국에 대한 이 대통령의 반대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안을 내놓았다.
그것은 반공중국인프로는 중립국에, 그리고 잔존반공한국인포로는 비무장지대로 이송하는 방안이었다. 이 대통령은 내 안에 관심을 가졌으나 이 자리에서는 가부의 대답은 하지 않았다.』
한편 「워싱턴」은 포로석방 후에 조성된 중대사태에 대비하느라고 더 여념이 없었다. 「아이크」행정부로서는 아주 골치 아픈 세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해나가야 했다. 즉 우선 이 대통령의 폭탄이 더 이상 터지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튼튼히 하고, 공산측에 6·18조치에는 미국이 무관하다는 것을 납득시키고, 한국에서 손을 떼라는 국내의 과격여론을 진정시켜야 했다. 「아이젠하워」대통령은 이 어려운 일들을 그의 독특한 「중도적 식견」으로 잘 처리하여 시련을 이겨냈다. 이 무렵의 회상을 「아이젠하워」대통령은 그의 회고록에 이렇게 담고있다.
『먼저 이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낸 후 백악관에서 장시간 숙의를 계속했다. 6·18조치로 우리는 아주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이 대통령에 대해서는 그런 행동을 되풀이한다면 공산주의와의 전쟁에서 그를 도우려는 미국 노력이 쓸모 없게 된다는 것을 인식시킬 필요가 있지만 한편 공산측에 대해서는 이 사건으로 미국이 한반도로부터의 철수를 고려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절대 안되었다.

<「로버트슨」국무차관보 급파>
그렇게 되면 공산측에 대한 항복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이때 나의 몇 동료까지도 미국이 한국으로부터 철수를 결정할 경우 한국군의 방해에 의해 큰 손실 없이 물러날 수 있느냐를 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는 사태를 면밀히 검토한 후 수습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덜레스」국무장관은 공산측이 휴전을 바라고 있은 이상, 이 대통령의 이번 행동을 결국은 눈감아주고 우리가 적당한 보장만 준다면 협정에 조인하리라는 의견을 강력히 내세웠다. 「덜레스」자신도 이 대통령에 상당히 강경한 서한을 보내는 동시 전문내왕만으로는 이해부족이 생기기 쉬우니 「월터·로버트슨」국무차관보를 직접 서울에 보내도록 했다.
이 무렵에 짐작은 했지만, 일부 국내여론은 기가 찰 정도로 과격했다. 상당수의 미국인 머리 속에는 정말 적이 누군가라고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7월1일의 기자회견에서 어떤 질문자에 대해 「적은 지금도 북한에 있다」고 주의를 환기시켜야했다.
나는 같은 원칙과 같은 사고에 헌신하고있는 동맹제국이 그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과 방법에 있어 의견이 상치될 때 생기는 곤란한 사태의 괴로운 한 예를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중이라고 설명하였다. 동맹의 역사란 그런 것이며 우리는 이것을 지나치게 실망해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도 나는 말하였다.』
◇주요일지(1953년4월29일∼30일)
※29일 ▲공산군상이 포로 5백명 인도 ▲이 대통령, 기자회견서 중공군철수요구 ▲국부주재미군고문 7백명으로 확장 ▲「처칠」수상, 강대국회담개최 가능하다고 언명
※30일 ▲「미그」기 5대 격추파 ▲휴전회담 포로관리 중립국 지명문제로 이견 ▲「라오스」에서 호군과 불군 격전 계속 ▲태국, 미국에 무기제공요청 ▲북한서 석방된 불 민간인 「모스크바」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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