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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지키려 한 한국 꼭 보고 싶었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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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푸른 눈의 항일독립투사’ 스코필드 박사의 외증손자 콜 크로포드는 25일 서울대 스코필드 홀 앞에 걸린 할아버지의 초상 앞에서 “용기와 신념, 그게 바로 할아버지가 내게 남긴 유산”이라고 말했다.

‘3·1 독립운동’의 기세가 전국으로 퍼져 나가던 1919년 4월 15일. 일제는 경기 화성 제암리에서 주민들을 교회에 가둔 뒤 불을 질러 참혹히 학살했다. 그로부터 이틀 뒤 소식을 들은 한 캐나다인이 현장을 찾아 그 처참함을 사진에 담았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1889~1970) 박사. 그가 기록한 이야기와 사진은 그해 9월 중국 상하이의 유력 영자지 ‘차이나 프레스’에 연일 보도됐다. 일제의 만행이 세계에 낱낱이 알려진 시발탄이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과 더불어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는 스코필드 박사의 외증손자 콜 크로포드(Cole Crawford·20)도 할아버지의 용기와 헌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크로포드는 사단법인 호랑이스코필드기념사업회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25일 서울대 수의대 건물 스코필드 홀에서 만난 그는 “한국인의 독립을 위해 싸운 할아버지의 신념을 깊이 존경한다”며 “한국에 처음 와보지만 오랜 친구집에 온 것처럼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크로포드는 현재 캐나다 겔프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다. 지난 9월부터 홍콩 링난대에 교환학생으로 와 있다 기념사업회와 연락이 닿아 할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한국땅을 밟았다.

 크로포드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를 통해 할아버지의 얘기를 많이 들었다”며 “할아버지가 그토록 지키려 했던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곳인지 꼭 와서 확인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스코필드 박사는 캐나다 토론토에 동상이 세워졌을 정도로 추앙받는 분”이라며 “인생의 역할 모델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스코필드 박사는 1916년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와 1919년 ‘제암리 학살 사건’을 세상에 알린 이유로 이듬해 일제에 의해 추방된다. 호랑이처럼 굳은 의지로 한국인을 돕겠다며 자신의 이름을 석호필(石虎弼)로 지었다. 1958년 서울대 수의대 교수로 임용돼 다시 한국으로 들어온 그는 1970년 서울에서 눈을 감았다.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크로포드는 지난 22일 입국해 서울대 박물관에서 열리는 스코필드 박사 회고전에 참석했다. 그는 “할아버지가 한국에서 했던 일을 기억하며 행사까지 여는 것에 대해 감사드린다”며 “저도 어떤 방식으로든 남을 도우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26일 스코필드 박사의 제자인 정운찬 전 총리와 점심식사를 하며 할아버지의 생전 모습을 되새길 예정이다. 27일엔 화성 제암리를 방문하고 현충원 외증조 할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한다.

 그의 꿈은 재생에너지 등 환경 분야 사업에 종사하는 것이다. 크로포드는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항상 고민해 왔다”며 “가능하다면 한국이나 아시아 지역에서 일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글·사진=이정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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