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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때 일본에 끌려간 한국인 노무자|이렇게 혹사당했다|상 조사단의 보고에 나타난 그 가공할 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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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동경=박동순 특파원】제2차 대전 중징용이란 이름으로 북 해도에 끌려가 강제 노역을 당한 한국인 노무자들의 혹사 실태가 일본의「북해도 한국인 강제 연행 진상 조사단」(단장 미기 일변연인권옹호 위원장)의 조사로 밝혀지고 있다.
이 조사단은 지난 4월10일부터 2주일 동안 2개 반으로 나눠 북해도 동북과 남부 지역을 현지 답사, 한국인과 일본인 30여명의 증언을 듣는 등 1차 조사를 끝내고 지난 9일 동경에 모여 조사 보고서 작성 문제와 2차로 실시할 구주 탄광 지역의 조사 계획 등을 협의했다.

<거의 강제로 끌려가>
이날 모임에서 종합된 중간 보고에 따르면 1935년∼45년까지 일본에 강제 연행된 한국인 노무자는 72만명으로 이 가운데 34만명이 탄광에서 인간 이하의 학대를 받으며, 강제 노동을 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탄광에 끌려간 한국인 노무자는 당시 일본 전체 탄광 노동인구의 3분의1에 이르렀고, 이들은 구주 지방에 약17만 명, 북해도 탄광 지대에 7∼8만 명이 배치됐다.
특히 북해 도에는 그 전부터 거주하고 있던 한국인 탄광 노동자까지 포함, 한국 노무자만 10만 여명에 이르러 북해도 전체 탄광 노동 인구의 40%를 차지했고 패전 당시에는 50%로 늘어났다. 이들은 모두 조선 총독부가 징용 형식으로 끌려간 사람들이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각 산업 단체 등에서 신청하는 인원을 후생 성에서 사정, 조선 총독부에 동원 지시를 내렸다. 조선 총독부는 각도별로 모집 인원을 할당, 일본의 해당 업체에서 파견된 모집 원이 도-군-면사무소를 거쳐 구장 (구장) 또는 경찰서장의 힘을 빌어 강제로 연행해 갔다.
이들은 대부분 부산에서 배편으로 북해 도의「오다루」, 「무로랑」으로 실려 가 이른바 「황민 훈련」「작업 훈련」등 9종목의 고된 훈련을 받은 뒤 바로 탄광 등에 투입됐다.
탄광에서 맡는 일은 가장 힘들고 노동 조건이 나쁜 운반부·채탄부·지주부 등 주로 갱 내부(갱 내부)로 한국인 노무자의 90%가 이 같은 일을 맡았다.
「유우바리」탄광의 경우 1944년 상반기에 한국인은 갱 내부 5천4백3명에 갱 외부는 5백82명뿐인데 비해 일본인은 갱 내부 2천4백3명에 갱 외부는 4천7백71명으로 한국인에 대한 차별대우가 얼마나 심했는가를 말해 주고 있다.

<노임은 일인의 30%>
노동 시간은 하루 10∼12시간,『6개월간 햇볕을 못 볼 정도(고경덕씨=당시의 노무자·이달시)였다. 노임도 차별적으로 지급되어 일본인 광부의 급수별 노임 지급 합계가 8백77「엥」인데 비해 한국인은 3백24「엥」에 불과했다. 또한 직종 차별 때문에 한국인 노무자의 재해 율과 사상 율도 극히 높았다.
한일 노동자의 부상을(1942년)을 보면 한국인 14·6%에 일본인은 2·8%. A제강소에서는 일본인 노동자의 1할에 불과한 한국인 노동자가 총 재해의 35%를 차지했으며 B제강소의 재해 율은 일본인0·98%에 대해 한국인은 5·62%로서 약 6배였다.
따라서 도주 등 사상으로 인한 한국인 노무자의「소모율」이 2년간에 66%에 달한 탄광도 있다.
그 결과 일본 전국의 강제 연행 한국인 노무자 평균「소모율」은 연행이 시작된 후 3년만에 35·6%에 이르렀다.
한국인 노무자는 일본인과 분리, 쇠창살이 달린「바라크」로 된 별칭「감방」에 수용됐다. 보통 30첩 크기의「다다미」, 때로는 마루방에 40명 정도가 기거했으며 절반 이상의「감방」에는 난로도 없었다.
물자가 극도로 부족했기 때문에 작업복이나 작업 회도 제대로 지급이 안되어 반소매「샤스」에다「팬티」만 입고 짚신을 신은 채 작업을 하기도 했다(안상렬씨). 식량 부족도 심각하여 영양실조 자가 속출했는데 바닷가의 해초를 모래가 묻은 채 뜯어먹기도 했으나 이나마 발각되면 반죽음이 될 정도로 매를 맞았다.
그러기 때문에 탈주자가 나지 않도록 심지어는 변소마저도「똥통」에다 뾰족한 쇠 꽂이를 빽빽이 꽂아 탈출구를 막았다.
이렇게 해서 사실상의「형무소 살이」등을 겪은 노무자들이 부지기수로 희생되어 지금도 북해 도의 탄광 지대나 철도 선로의 곳곳에서 유골 무더기가 잇달아 발견되고 있는데『철도 침목 한 개에 한국 노무자 한 명』이라는 표현이 쓰여질 만큼 희생자 수는 엄청나게 많다.
지금「삽보로」시에 살고 있는 최천수씨(54)의 경우는 1942년 10월, 부산 부두에서 일하다 연행돼 왔는데 보통 하루12시간, 배정 량을 못다 했을 때는 하루12시간이나 일한 적도 있다.

<쇠 꽂이로 지지기도>
같이 일하던 일본인2명이 도망쳤다고 시뻘겋게 단 쇠꼬챙이로 등을 지져서 지금도 등에 끔찍한 화상이 남아 있다. 참다못해 도망을 쳤다가 붙들렸는데 양철 쓰레받기에 무릎을 꿇고 앉힌 것이 가장 괴로웠다는 얘기다. 나중에는 머리에 손가락 하나가 그대로 들어갈 정도의 흠이 파였다고 했다.
강별시의 일본인「택시」운전사「나구모」(남운)씨(41)는 삼능「비바이」광업소 참변의 목격담을 자진해서 증언했다.
당시 이 광업 소의 한국인 노무자는 2천8백17명. 1943년 9월13일, 89mm의 집중호우가 쏟아졌을 때 개울가에 있는 노무자「감방」의 일본인 간부 7∼8명은「감방」에 자물쇠를 잠근 채 자기들만 피신을 했고 방안에 남은 노무자 1백여 명은「감방」째 토사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다.『산이 무너져 묻혀 가는 감방의 쇠창살문에 노무자들의 얼굴과 손이 주렁주렁 매달려 아우성치고 있었다.
지금도 그때의 그 얼굴들이 눈에 선하다』는 남 운 씨의 증언이다.
밤길을 걷다가 느닷없이 붙들려 북해 도로 달려왔다는 김달선씨(53)는「무로랑」의 군수 공장에서 일했는데『일본인 책임자가 구덩이를 파래서 시키는 대로했더니 병으로 기동을 못하는 동료 노무자를 그대로 집어넣고 흙을 덮어 버렸다』고 증언했다.
또한 고경덕씨는『일본에 가면 좋은 일자리가 있다는 꾐에 빠져 왔다가 견디다 못해 도망을 했으나 붙들려 한달 내내 고문을 당했다. 정신을 잃으면 물을 끼얹어 작업장에 데려가 일을 시켰는데 당시의 상처로 온몸의 껍질이 한 벌 벗겨졌다』고 했다.
「무로랑」시에 사는 이씨(창씨 명 암본황일·다방 업)에 따르면「이당끼」해변에는 병과 영양실조로 죽은 줄잡아 4백명 이상의 노무자가 묻혀 있는데 지금은 그 위에 주택이 들어서 있다.
이밖에도 삼릉미패 광업소의 폭발 사고로 노무자 l백77명(한국인 32명)이 죽자 시체를 철판 위에 쌓아 놓고 나흘 동안을 태웠다 (정임진씨·60세).
또한 하루 2, 3건의 시체 매장이 있었으나 검시도 안 시키는 걸로 미루어 학살도 꽤 있었던 것 같다 당시의 탄광 담당 일본인 의사 영목량일낭씨·69).

<하루 50회 얻어 맞아>
조사단은 매장 허가 부에 실린 한국인 노무자 명단 가운데서 사인이「두개 내출혈」로 기재된 2명의 사망 기록을 발견했는데, 당시의 일본인 노무 계원은『머리를 맞아 죽은데 항의, 노무자들이 3, 4일간 파업을 해서 큰 소동이 났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우룡「댐」공사장에서는『작업 중 실족 추락 노무자를 그대로 둔 채「시멘트와 자갈을 쏟아 넣어 묻어 버렸고』『곤봉으로 두들겨 맞은 동료가 병원에 데려간다고 끌려나간 채 행방불명이 됐는가』하면『하루 평균50회를 곤봉으로 구타당한 일도 있었다.』
일본인 감독은 한국인 노무자들을 짐승처럼 한「마리」「마리」로 불렀고, 이렇듯 짐승처럼 혹사당하다 숙소로 돌아오면 정신없이 잠이 들었다가 이튿날 아침에야 곁의 동료가 죽어 나간 것을 발견하는 수가 허다했다. 이러한 한국인 노무자들의 참상은 당시의 북해「타임스」보도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제목만 보더라도『(조)선인 토공 부를 괭이로 구타, 비밀리에 치료 중 사망 발각』(1929년12월3일자),『살해한 (조)선인을 토장』(1927년 11월18일자)등 얼마든지 있다.

<사망자 수 파악 못해>
종곡군에 있는 천모야 교회의「과거장」에는『본사에서 장례를 치른 자 90명, 그 밖의 곳에서 죽은 자 무수, 실로 비참하기에 후일을 위해 이를 기록해 둔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가장 애처로운 것은 창녀로 끌려온 한국 여성들의 운명이다.
「하꼬다데」근처 해안의「입대갑」은 유명한 시인 석천탁목의 비가 서위는 북해도 유수의 관광지. 이 절벽 위에서 일본에 위안부로 끌려온 젊은 한국인들은 바다에 몸을 던져 집단 자살했다. 현지의 한 한국인 고 노는『저 파도 소리가 들립니까! 엄마, 엄마하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내 귀에는 젊은 한국 여인의 부르짖음이 들립니다』라고 절규했다.
1945년6월에「삽보로」통산 국 석탄 부가 작성한「북해도 석탄 광업 노무자 구성 조사표」에는「조선인」항목에「여자 정신대 1백65명」이라는 기록이 지금도 뚜렷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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