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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 어느 평양의 봄: 장성택 과 김경희 그리고 황장엽

중앙일보

입력

1997년 초 북한의 노동당 비서 황장엽이 베이징의 한국 대사관에 망명신청을 하여 전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행사를 끝내고 베이징에서 평양행 국제열차로 귀국하기 직전이었다.

지금부터 40여 년 전 평양에도 봄이 왔다. 황장엽이 총장으로 있는 김일성종합대학의 캠퍼스에도 봄꽃이 만발하였다. 경제학부의 정치경제학과에 강원도 시골 출신의 신입 남학생이 여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는 훤칠해 보이는 키에 얼굴은 맑고 귀족형의 호남에다가 말 잘하고 악기 연주며 춤도 잘 추는 팔방미인이었다. 그리고 두뇌회전이 빠르고 술 실력도 대단했다.

당시 김일성종합대학의 졸업생이었던 김정일은 장성택을 첫 눈에 보고서 어릴 때 사고로 익사한 동생 “슈라”(김만일)를 연상하고 호감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장성택의 매력에 폭 빠진 여학생은 뜻밖에 같은 클래스의 여동생 경희였다. 경희는 김정숙을 같은 어머니로 둔 유일한 혈육이었다. 김정일은 어머니를 존경하였다. 자신의 이름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 자중에 하나 씩 골라 지어진 것이다.

소문을 들은 김일성은 반갑지 않았다. 본래 당(?)은 아들에게, 군(軍)은 사위에게 맡길 생각이었는데 장성택은 자신이 바라는 사윗감은 아니었다. 더구나 과시욕이 강하면서 술과 여자와 함께 놀기를 좋아한다 하니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김일성은 장성택을 딸과 떼어 놓을 심산으로 멀리 강원도 원산시의 원산경제대학으로 강제 전학시킨다.

애가 타는 쪽은 경희였다. 오빠에게 애원도 하였다. 평양에서 원산까지 찾아다니는 것도 한 두 번이지 보통 딱한 노릇이 아니다. 김정일은 여동생의 청을 들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장성택을 평양으로 불러들이고 두 사람을 나란히 모스크바 유학까지 주선한다. 그 후 두 사람의 사랑은 결실을 맺어 김일성의 회갑 년인 1972년에 결혼으로 연결된다. 주례가 있었다면 황장엽총장이 맡았는지 모른다.

장성택은 은사 황장엽과도 사돈 관계를 맺는다. 그의 누나 장계순의 딸이 황장엽의 외아들과 결혼한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 평양의 봄”에 등장했던 황장엽과 그의 제자들의 운명이 드라마틱하게 바뀐다.

황장엽은 모스크바 대학의 철학박사 출신으로서 주체사상 연구로 김일성 주석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제자였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는 맞지 않아 국외로 빠져 나와 베이징에서 망명한다. 장성택은 자신을 매제로 받아들이고 출세시킨 김정일 위원장에게는 충성을 다 하여 그가 죽은 후 권력서열 2위의 고명대신(顧命大臣)까지 되었다. 그러나 처조카 김정은 제1비서의 마음에는 들지 않아 김정은을 둘러 싼 과거 자신의 부하들에 의해 “양봉음위(陽奉陰違)”로 처형된다.

장성택의 실각을 예언한 소설 “서른 살의 공화국”에는 장성택이 김경희와 함께 베이징 행 비행기를 타고 있다. 소설은 장성택이 실각해도 김경희와 함께 중국 상하이의 모 대학에 연구원으로 가는 것으로 끝을 맺어 준다. 부드러우면서 상식적인 결말이다. 그러나 현실의 북한은 그러한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장성택은 즉결 처분과 같은 전격적이고 냉혹한 처형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머리 좋다는 장성택도 손 쓸 틈도 없이 허를 찔려, 황장엽 같은 망명의 기회조차 놓쳤는지 모른다. 어느 지인은 “라이부지(來不及)”였다면서 아쉬움을 보인다.

유주열 전 베이징 총영사=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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