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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미시 세계사] 칼리닌그라드 쾨니히스베르크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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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호 29면

러시아가 자국에서 가장 서유럽에 가까운 칼리닌그라드 지역에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사정거리 400㎞의 이스칸데르-M 탄도미사일을 1년6개월 전에 배치했다고 한다. 최근 이런 사실이 알려져 전 세계가 술렁거린다. 러시아는 몇 년 전부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폴란드에 미사일을 배치하면 맞대응하겠다고 공언해 왔다.

칼리닌그라드주(州)는 본토와 육지로 연결되지 않은 러시아의 역외 영토다. 500㎞ 넘게 떨어져 있다. 소련의 위성국과 산하 공화국이었지만 현재는 나토와 유럽연합(EU) 회원국인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둘러싸고 있다. 주도인 칼리닌그라드는 러시아 유일의 발트해 부동항이니 전략적·군사적 가치가 높다.

칼리닌그라드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진 독일 영토였으나 포츠담회담 뒤 소련 러시아공화국으로 넘어갔다. 이름은 46년 세상을 떠난 볼셰비키 미하일 칼리닌의 이름에서 땄다. 그전까지 칼리닌그라드주는 동프로이센의 북부(남부는 폴란드로 귀속)였으며 칼리닌그라드 시는 쾨니히스베르크라고 불렸다.

1945년 1∼4월 쾨니히스베르크 전투 도중 주민 30만 명이 숨지고 180만 명이 선박 편으로 독일 본토로 탈출했다. 종전 때까지 남은 소수의 노인·여성·어린이·병자는 소련에 의해 추방됐다. 텅 빈 땅에 소련 주민이 이주해 오늘날 94만 명이 산다. 행정구역 이름도 러시아 냄새가 물씬 나는 모스코브스키, 레닌그라드스키 등으로 바뀌었다. 러시아 도시 중 공산주의자 이름을 여전히 붙이고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다. 그래선지 이곳 출신인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1724~1804)의 이름을 딴 칸트그라드로의 개명도 거론된다.

이 지역은 독일에도 각별하다. 1255년 이교도 슬라브족을 상대로 ‘북방 십자군전쟁’과 포교활동을 벌이던 튜튼 기사단의 요새 건설이 출발점이다. 기사단은 현지 삼비아인과 전쟁을 벌일 때 이를 지원한 보헤미아 국왕(오스트리아 대공 겸임) 오토카르 2세를 기려 독일어로 ‘왕의 산’이라는 뜻의 쾨니히스베르크라고 명명했다.

1525년 호헨촐레른 가문의 알브레히트가 초대 프로이센 공작이 됐으며 1657년에 프로이센 공작의 지위와 영토는 같은 호헨촐레른 가문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산하로 넘어갔다. 베를린을 본거지로 하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세력을 키워 공작보다 높은 국왕의 지위를 원했지만 명목상의 독일 국왕이 있는 신성로마제국 영토 안에서는 불가능했다. 대신 제국 영토 밖(제국 형성 이후 독일계가 정복해 주민을 독일화시킨 영토)인 프로이센에서 국왕 자리를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프리드리히 1세는 1701년 프로이센 국왕에 오르고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을 합친 새 프로이센 왕국은 수도를 베를린으로 잡았다. 프로이센은 1871년 독일 통일을 주도했으니 현재 독일연방공화국의 직계 조상이랄 수 있다.

하지만 동서독 통일 당시 헬무트 콜 총리는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칼리닌그라드에 대한 영토적 요구를 절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전해진다. 냉혹한 국제정치 현실을 감안한 것이다. 영토 확장으로 시작된 나치 독일의 야망이 어떤 결과를 빚었는지는 너무도 잘 알려져 왔다. 지금까지의 평화는 이런 독일의 반성과 현실 인식 때문이다. 만약 영토를 놓고 긴장을 유발하려는 국가가 있다면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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