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인이 본 한국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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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최근 서울에서는 『서구인이 본 한국인』이라는 주제 아래 흥미 있는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발표를 한 외국인들은 모두다 관광목적의 단기 여행자가 아니라 한국에 일터를 가진 장기체재자라는 점에서 그들의 소견은 주목할만한 것이다.
남이 우리 나라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는 문제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우리들의 관심사가 된다.
첫째, 우리 스스로를 보기 위해서는 개인의 차원에서나 집단의 차원에서나 자기의 두 눈 이외의 제3의 눈을 필요로 한다. 이 경우 남의 눈은 우리를 보는 거울이 된다.
개인의 모습이야 더러는 굳이 남의 눈을 빌릴 것도 없이 되려 남의 눈을 피한 자리에서 진짜 물리적인 거울에만 비춰보면 되는 수도 있다. 그러나 집단생활을 비춰보는 물리적인 거울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들 민족집단의 모습을 인식하기 위해선 불가불 남의 눈, 제3국 인의 눈이라는 심리적인 거울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둘째, 이 제3국 인의 심리적인 거울이 물리적인 거울처럼 우리들의 모습을 정확하게만 비춰주고 있다면 별반 문제는 없다. 그러나 물리적인 거울에 비친 영상과는 달리 심리적인 거울에 비친 심상은 제3자가 갖는 마음의 선입주나 편견이나 무지에서 흔히 왜곡·과장·오해가 되어 본래의 모습과는 다른 엉뚱한 것이 되는 수가 있다. 여기에 「월터·리프먼」이「여론」의 허구를 밝힌 선구적인 탐구이래 『이미지론』에 관해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모은 까닭이 있다.
셋째, 우리가 극동의 「은둔국」으로서 남이야 무어라고 하든 오불관언이라는 쇄국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면야 외국인이 본 한국 상에 무관심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세 차례에 걸쳐 개국을 했다. 첫 번 째는 한말에 외압에 못 이겨서 피동적으로. 두 번 째는 2차 대전에 의한 일제통치의 종말이 가져다준 밖으로부터의 「선물」로서. 그리고 세 번째는 60년대의 수출입국, 공업화의 추진이라는 능동적인 정책선택으로서-.
말하자면 대외적 개방이란 이제 우리의 국가적 운명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넷째, 공업화의 추진은 한국의 경우 근대화의 추진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나라의 근대화 작업은 전통적인 문화와의 마찰 없이 순조롭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공업화라는 이른바 「세계문화」는 민족전통의 「고유문화」와의 끊임없는 갈등·대립·분규를 빚어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우리』와 『남이 보는 우리』 사이에는 심각한 구열이 생길 소지가 여기에 있다.
다섯째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우리의 고유문화가운데서 어떤 것이 주체적이면서도 민주적이며 세계문화가운데서 어떤 것을 취사선택해야 할 것인가를 가리고 있는 단계에 와있다 하는 점에 있다. 우리는 지금 나라의 근대화작업의 성패를 가름하는 중대한 갈림길에 서있는 것이다. 이 경우 위험은 양쪽에 있다. 한편에는 세계문화의 물결 속에 발 디딜 지반을 잃고 표류·침몰해버리는 위험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그 반대로 세계 성 없는 전근대적인 전통의 권위에 집착해서 퇴영·고립의 무덤을 팔 위험에 있다.
우리는 지금 이처럼 중차대한 시기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지금 이곳에서의 참모습을 알아야 할 필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는 것이다. 제3국 인의 심리적인 거울에 비친 한국의 「이미지」에 관심을 갖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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