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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한 귀족들의 취미 깃든 도자기의 극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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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우리나라에서도 용삼채의 옛 도예품이 발견됐다.지난 8일 경주시 조양동의 성덕왕릉 가까운 산언덕에서 나무를 심다가 이 진귀한 물건이 드러나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는 소식이다. 그것은 돌로 만든 석고에 금이 모여져 1천 수백년간 땅속에 묻혀 있었으니 곧 신라 때 한 귀족의 유골을 담은 골연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당삼채가 발견되기는 이것이 처음.학계의 관계 전문가들은 매우 요긴하고 획기적인 역사유물이 되리라 주목하고 있다.어쩌면 당나라 제품이 아닌 신라 삼채가 아니겠느냐는 점 때문이다. 신라에서 만든 삼채임이 밝혀진다면 일본 나라 삼채의 전내 경위를 입증하는 표적이 되는 것이라고 문화재관리국은 말하고 있다.
이 삼채란 중국 용 나라에서 발달된 특유의 채색 도기이다. 그 시초는 6,7세기에,당나라의 국세가 다른 영토에 미치자 서역문화와 접촉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이란」「이라크」등 중동지방에서 발전된 . 연유의 도기기술이 수입된 것이다.한나라 특유 도기에 삼채류가 도합돼 있음은 일찍부터 그런 문학 교류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백·연·황 3가지 빛깔이 사례>
여기서 연유란 납을 매용제로 하는 유약을 말한다.도자기 묘면에 유리질을 입히기 위하여 연분을 칠해서 구워내는 것이다. 이매 3가지의 빛깔은 백·연·황을 떠는 것이 통례이나 더러는「코바」금색과 갈색을 곁들이는 경우도 있다.이번 당추 발견의 삼채가 황색을 바탕으로 하여 분홍·갈색· 「코발드·블루」의 색조를 나타내고 있음은 바로 용이 채취한 부류임을 여실히 실명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삼채는 자기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도기에 가까운 것.자기 구울 때 보다는 훨씬 낮은 9백∼1천도의 저화도로 구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비록 채색은 다채로울 망정 그릇이 약하기 짝이 없어서 전혀 실용성이 없다. 흡입성이 많고 깨지기 쉬우며 한냉에도 부적당하다.다만 이것은 귀족들이 사치하게 부장하는 명기로 흔히 사용했고 더러는 복수한 제의기로서 쓰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삼채가 세계의 도예사상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용대의 화사한 귀족취미를 대표하는 도예품 이란 점이요, 또 중국대륙에서 처음으로 이지문화를 받아 들여 국제성을 먼 정금 시기를 이루었다는데 있다.당 이후 송·명에 걸쳐서도 삼채이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이른바 용삼채의 잔영에 불과하다.

<일도 그 나름대로 삼채 있어>
역시 중국의 전통적인 것은 잿물을 유약 (회유)으로 하는 고화도의 자기이다.이 유약은 기원전2, 3세기 깨 전국시대부터 독자적으로 발명해서 교자로 발전시켰으며 우리나라의 고려책자도 그를 도입해 한국 나름대로 발전시킨 도자기이다.이런 자기에비하면 삼채는 한때의 신기한 사치품이라 할만하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용 나라와 교류가 있었으니 만큼 삼채가 없을 수 없다.일본에는 그들 나름으로 구워낸 이른바 나량 삼채가 있었다.당나라 본고장의 그것에는 발색과 유반이 도저히 견줄 수 없는 형편이지만 일본제품이 있음을 자랑해왔다.물론 나량의 도공이 한국에서 건너간 기술자일 것이라는 점은 여러 점으로 추정되지만 한국에서 발견 예가 없으므로 문화의 전마를 실증할 방도가 없었다.
그 동안 한국에서 발견된 유사품은 일제 때 덕수궁 미술관이 당주에서 입수한 것으로 건하는 2개의 합이 있다. 그릇의 바탕색은 갈색에 가깝고 짙은 암연의 반문이 있는 게 그것이다.도자기 전문가 최순우 씨는 이것을 삼채의 한 부류라 주장한 바 있는데,역시 당삼채와는 차이가 많아 석연찮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그 삼채가 체념하게,그것도 남주에서 발견되었으니 학계의 이목을 모을 수 밖에 없다.

<신라 것이 확인되면 국회감>
그릇의 모양은 육조이래 육동기에서 보는 양식의 것이지만 신나나 백제토기에서도 더러 보게 되는 현태의 기형이다.중국 청동기의 명침을 따른다면 가마솥 즉 비이다.3개의 다리에는 수면을 조각하고 사자발을 달았으므로「삼채수각복」이다.이 삼채침의 뚜껑이 본시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는 접시모양의 책동기로 없었고 아직 다 삭지 않은 골편이 들어 있다고 한다.
어쩌면 이것이 고려로서 제작된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가장 진귀품 으로서 대용했는지 모른다. 골호의 주인공은 불구의 화장제도가 성행된 통일신라기인이 아닐까.국립 박물관 최순우 학예연구실장은 그 삼채도과 가령 석량·육동제 뚜껑 등을 앞으로 면밀히 검토한다면 신라삼채가 보다 확연해질 것으로 기대하고있다.
고궁박물관에도 많지 않은 당삼채요,일본에 있는 수점은 당물로 지정돼 있다.우리나라에서 아직은 유일한 진귀품이고 더욱 신라 것이란 점이 확연해진다면 말할 것도 없는 국당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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