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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그 생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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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파리8일 AP합동】8일 남불 「무젱」의 별장에서 향년 91세를 일기로 서거한 「파블로·피카소」는 생전에 이미 불멸의 명성을 획득한 20세기 최대의 화가였으며 회화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말썽 많은 그리고 죽기 직전까지 가장 정열적인 창작 활동을 계속해 온 다산적인 화가였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끊임없이 기존 형식을 파괴하고 새로운 형식을 창조했는데 「앙드레·말로」전 「프랑스」 문화상은 「피카소」의 85회생일 기념 회고전을 보고 『「피카소」의 생애는 우리 시대, 아니 전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파괴와 창조의 작품』이라고 논평했다.
「피카소」는 그림 외에도 도자기와 조각, 판화 「데상」 등 각 방면에 손을 대어 수많은 걸작들을 남겼다.
오는 5월 「피카소」의 최근 3년간의 작품을 모아 전시할 계획이었던 「아비뇽」 전시회 책임자인 「폴·튀오」씨는 이번 전시될 최근의 「피카소」 작품들이 종전과는 달리 전혀 다른 『새로운 시기』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에로티시즘」이 많이 가지고 훨씬 부드럽고 잔잔한 신중한 경향의 작품들이라고 전했다.
그는 1881년 10월 25일 「스페인」의 지중해 연안으로서 「말라가」에서 태어나 「바르셀로나」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미술 교사 겸 화가였는데 「피카소」가 14세 때 자기 아들의 재능에 압도되어 자기의 모든 그림 도구를 물려주고 다시는 그림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전한다.
14세 되던 해 「파블로」는 「바르셀로나」 미술학교에 입학, 이어 16세 때는 「마드리드」의 왕립 「아카데미」 미술학교에 진학했고 1900년 그의 나이 19세 때 처음으로 몇 달 동안 「파리」에 머무르면서 세계 화단의 공기를 쐬었다.
이어 1901년 다시 「파리」로 떠나 1904년 「파리」에 영구적으로 정착하여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1901년부터 1906년까지 이른바 그의「청적시대」를 거쳐 「피카소」는 「이베리아」의 조각과 「아프리카」의 가면, 「폴·세잔」의 작품에 영향을 받아 「거트루드스타인」여사의 초상화 같은 입체파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앙드레·드랑」과 「조르지·브라크」 「앙리·마티스」 등과 함께 이른바 「입체파」의 근거를 세워 미술계의 혁명을 일으켰다.
「피카소」는 이어 1920년대에 신고전주의 시대를 거쳐 1937년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게르니카』에서 그의 강력한 표현주의적 시기의 절정을 기록했다.
이 작품은 39년 「뉴요크」의 현대미술관에 대여되었는데 「피카소」는 「프랑코」 총통이 사라진 후 「스페인」에 이 작품을 양도하겠다고 말했다.
그후 그는 그림 외에도 조각과 도자기, 단색화 등 각 가지 방면에 걸쳐 정열적인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그후 그는 죽기 직전까지 때때로 새벽3시까지 창작에 몰두함으로써 89세까지 창작 활동을 했다는 「미켈란젤로」를 능가한 예술 사상 최대의 장수 창작 활동을 기록했다.
방이 35개에 정원이 17「에이커」이며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쌍탑 대 저택에는 이날 그의 가족과 친구들이 그의 죽음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 자리에는 그의 부인인 「자클린」여사 (47) 와 첫번째 부인인 소련인 「댄서」 「올가·콜코바」여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외딸이 끼여 있었다. 【AP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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