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은 어디로|특파원이 마지막 본 진통의 현장|평화의 월남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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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신상갑 전 주월 특파원】휴전 2개월이 지나 미군을 비롯한 모든 우방들이 철수함으로써 월남은 실로 1백여년만에 외국군의 개입에서 벗어났다. 월남문제의 월남화-그 과정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랜 전쟁이 몰고 온 내적 모순은 오히려 외국군의 급격한 철수로 더욱 심화하는 듯 하다. 그것이 평화에로의 진통이 될지, 아니면 혼란의 심화로 굳어질지는 이제 월남인 손에 달려있다. 2년2개월을 월남특파원으로, 전쟁과 평화에의 진통을 아울러 목격한 신상갑 기자의 「마지막 본 월남」을 여기 소개한다.
국제공항은 한나라를 실상대로 반영해주는 거울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이공」의 관문인 「탄손누트」국제공항도 월남을 적나라하게 반사하는 거대한 거울이다. 71년1월 본 기자가 주월 특파원으로 「탄손누트」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한눈에 월남 전쟁의 가열상을 목격했다. 특히 군용공항을 겸하고 있는 이 국제공항은 공항이라기보다 전쟁 그 자체였다. 1분이 멀다하고 전투기·수송기를 포함하여 각종 군용기가 요란한 음색을 내며 이착륙을 하고있었고 일반 공항부분까지도 군인-주로 미군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로부터 2년3개월 만인 73년3월 「탄손누트」공항을 떠나 귀로에 올랐을 때는 전에 비해 현저한 정세의 체질변화를 목격했다. 미군의 철수가 완료되는 단계라 군복은 가뭄에 콩 나듯했다. 「파리」휴전협정 후의 월남의 생생한 투형이었다.
73년3월의 「사이공」표정은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여실히 증언했다. 아무리 눈을 닦고 보아도 전투복 입은 미군은 볼 수 없게 됐다. 휴전협정에 따라 미군은 완전히 철수하고야 말았다. 간혹 평상시의 군복을 입은 주월 미국 대사관 무관실 소속의 미군들이 「카메라」를 둘러메고 한가로이 「렌즈」에 「사이공」의 이모저모를 담는 모습이 보일 뿐이니 월남 시민과 미군과의 노골적인 노상활극은 자취를 감추게 됐다.
기자는 한 「사이공」시민에 가 물어보았다. 수만의 인명과 천문학적 경제지원으로 당신네 나라를 도와주는 우방군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고? 대답은 기자를 당황케 했다. 『「티우」대통령을 비롯하여 월남의 지도자들이 공적으로 미국에 감사를 표시하면 됐지 일반국민 하나 하나가 굳이 감사한 마음을 가질 필요야 없지 않느냐.』 듣고 보니 해석하기에 따라선 긍정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확실히 월남인의 체질에 맞는 명답(?)이었다.
또 하나 특기할 것이 있다. 2년 전만 해도 「사이공」을 비롯 한국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상점에는 으레 「브로큰·코리언」이지만 한국어를 꽤 잘하는 점원들이 많았다. 한국사람과 업무상 접촉이 잦은 월남사람들은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한국군 「지프」가 거리를 누비고 한국 기술자들의 왕래가 빈번했다.
그러나 3월 하순 우리 나라 군대가 마지막으로 철수하기 직전부터 한국열은 급격한 퇴조현상을 보였다. 한국어 열이 일본어 열로 일순에 바뀌었다. 어학에는 천재적인 소질을 타고난 이들은 일어 공부에 열성을 쏟고 있다. 이제 전후에는 일본 물결이 휩쓸 것이니 일어를 배워야 한다는 논리였다. 미군이 대량으로 진주하기 전만 해도 불어가 판을 치고 영어가 통하지 않았는데 정세의 한 단계의 변화에 민감한 이들의 몸에 밴 생리 갖기도 했다. 사실 공항 손님의 대부분이 일본인들로 메워지고 있다.
관광객이 아니라 미군이 물러간 다음 전후복구 계획을 비롯 각 분야의 뿌리깊은 침투를 노리는 일인들의 발걸음이 월남을 요란하게 울리고 있다. 미국은 공산일보전의 위기에서 월남을 구출하였다고 하나 월남 전역에서 「베트콩」을 몰아내는 데는 실패했다. 미국 자본주의의 물결이 월남의 반공사상을 고양하는데 막대한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2년 전만 하더라도 월남 정부와 「베트콩」에 두 다리를 걸친 「사이공」시민들이 많았으나 오늘날엔 본의든 아니든 반공 쪽으로 기우는 시민들이 격증한 것도 사실이다.
미제「콜라」맛과 미제 담배·미제 자동차에 몸을 담아본 사람이면 도저히 밀림 속에 가서 「베트콩」생활을 할 생각이 별로 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하기야 미제 덕을 보고 있는 측은 월남정부뿐만 아니라 「베트콩」이라는 역설이 성립될 수도 있다. 기자는 73년3월 어느 날 「탄손누트」공군기지 내부에 자리잡은 「캠프·이비스」안의 「베트콩」·월맹군사 대표단 본부를 취재 갔을 때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베트콩」장교로부터 자기의 영어회화 실력이 밀림에서 미군 방송을 들어 익힌 덕분이라는 것을 듣고 내심 고소한 일이 생각난다.
미제방송이 아니었다면 이 「베트콩」장교들이 영어공부를 할 수 있었을까.
지난번의 대통령 선거 중 어떤 투표장엔 유권자보다 투표장을 경비하는 군·경 수가 더 많아 보일 정도의 광경을 보고 이것이 월남의 정치현실이구나 하는 서글픈 느낌도 가졌다.
2년여의 파월 생활 중 눈으로 본 또 하나의 큰 변화는 불법집단이며 적으로 「사이공」정부에 의해 인정되고 있는 「베트콩」이 비록 일부일망정 월남 정부의 헌병과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사이공」시내를 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경우의 「베트콩」은 「파리」협정에 의해 탄생한 4자 군사 위원단의 일원인 「베트콩」대표회를 가리킨다.
2년 전만 해도 「제네바」협정으로 탄생한 국제 감시기구(ICC)활동은 마비되어 ICC대표의 모습을 잘 볼 수 없었으나 「파리」협정으로 생긴 새로운 국제 감시 위원회(ICCS) 대표들이「사이공」시내를 관광객차림 비슷하게 활보하는 것은 이색적인 대조였다.
「베트콩」의 「로키트」공격, 「테러」행위의 공포는 「파리」협정 발효 후는 말끔히 사라진 것도 달라진 일면이기도 하다. 하루 평균1백여 회의 휴전 위반, 「사이공」의 잠자리에서 포성이 아직 들리는 그런 식의 협정이지만 이런 불완전 협정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 월남 사람들의 일치된 견해인 듯 하다. 어떻든 휴전협정은 많은 기대도 위험 요소를 품은 채 살얼음판을 건너듯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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