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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 유성룡의 아들 유진의 난중 체험기 임진록(16)|홍재휴 교수(대구교대) 교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누님이 버선을 잃을까 자못 걱정하시더니 다시 기워 주고자 하되 무명이 없으므로 누런 석새베(삼승포)로 만들어 주었는데 한발은 누렇고 한발은 희었다.
가평원 최덕순이라 하는 사람이 서울에 있을 때 아버님을 자주 뵈러 다니었다. 그러나 그는 용심이 사나와서 아주버님(백부·유운룡)이 할머님을 모시고 가평 땅에 두어 달간 계시되 한번도 문안오지 않았다. 자기의 장모 홍판서 댁이 그 땅에 와 계시어도 도무지 붙이지 아니한 사람이니 하물며 우리야 무엇만큼이나 여겼겠는가.
그 사람의 아내는 홍담(홍담·자 대허·남양인으로 시호는 부효·선조 때 지의금부사·이조판서에 이름)의 딸이요 사인(정사품 벼슬) 벼슬을 하던 홍동록의 누님이다. 홍사인은 아버님과 자못 절친한 사이였다.
이같이 원의 실내는 좋은 가문의 사람이요, 마음도 어질었다. 남편의 하는 일을 늘 민망하게 어겨 매양 말리었지만 듣지 아니하므로 어쩌지 못하였다. 그래서 우리 있는 곳을 그리 가까이 두고도 남편이 두려워 발길은커녕 사람조차 못 보내었다.

<가평원 실내는 상냥해>
마침내 그 원이 감사에게 갈 일이 생기자 그 틈에 계집아이를 보내어 쌀 말을 보내고 또 나보고 다녀가기를 당부했다. 가보니 그 실내는 여간 따뜻하게 대접하지 아니하였다. 그 종이 우리의 지내는 이야기를 자세히 사뢰었는데, 내가 이삭 주우러 갔다가 버선 한 짝을 잃어 베버선으로 짝 채워 신은 것을 이르니 그 부인은 눈물을 지으시는 것이다.
『가엾구나. 이게 될 말이냐. 어디 그 발 좀 이리 내어봐라.』
내 신은 버선을 보자고 하니 그 계집종이 내 발을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나는 손으로 뿌리쳤다. 그 실내는 웃으며 자기 아들을 불렀다.
아들은 나보다 훨씬 컸었다.
『네 벗이다. 가엾게 고생하는데 네 옷을 벗어 주어라.』
실내의 말씀이 떨어지자 그는 입고있던 야청(청흑색) 중치막(웃옷의 한가지)을 벗어 나를 입혀주었다.
뿐더러 팥과 쌀을 각각 한 말씩 주며 『원도 아니 계시며 얼마 되지 않는 것이지만…더 오래있게 되거든 다시 와 다녀가거라』하고 이르시었다.
나는 절하고 나왔다. 보름이 지나니 다시 양식이 떨어졌다.
생각타 못하여 양근 한 여울(대탄)의 섬덕으로 가기로 했다. 이 마을에는 아버님이 논 6, 7마지기를 주어 놓은 게 있어 종 대복이가 맡아 농사 지었고, 또 먼 친척도 여럿 있었다.
일행 권속 열 다섯이 양근 미원현으로 향하여 가는 마을마다 빌어먹으며 4일만에 양근고을을 지나게 되었다. 그대 남언경(남언경?자 시보·호 동강·의령인·공조 참의를 지냄·양근의 미원기원에 제향) 이라 하는 이가 의병장이 되어 고을에 진을 치고 들어 있었다. 이진사가 고을에 들어가니 무사히 가라고 하며 군 하나를 붙여 주었다.

<우물 불에 젖은 옷 말려>
큰 강가에 다다라 날이 춥고 물이 깊으니 말 하나를 가지고 건더기란 쉽지 아니하였다. 부인네는 겨우 건너는 듯 마는 듯 하였다. 그때 지평 쪽에서 어떤 양반이 말 타고 달려오다가 물위에 엎드려서 말했다.『모두 양반인가 싶은데 내 급하여 말을 못 내리겠소. 지금 지간에서 예(왜)가 거창하게 쳐들어와 미구에 여기까지 닥치게 될 것이니 빨리 이 물을 건너시오.』
그 사람은 급박한 사경을 의병에게 알리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가 하도 급히 달려가는 양을 보고 모두 놀랐다. 옷 벗을 사이도 없이 물에 와락 달려들었다. 다행히 그 강이 넓기는 하나 그리 깊지는 아니하여 겨우 내 가슴에 채워 닿았는데 차기가 얼음장같았다.
막 물을 건너니 도적은 오는 듯하나 아직 나타나지 아니했다. 그곳 권당들은 이 기별을 듣고 마주 사람을 보내 우물 불을 질러 놨으므로 우선 젖은 옷을 쬐어 말렸다.
보내온 말을 나누어 타고 들어가니 대복이는 어디론가 나가고 없으되 다만 타작 곡식 5, 6섬이 있었다.
거기 권당들도 곡식을 한 두말씩 모아 주어 10월까지 무사히 지냈다. 동짓달 들어 강물이 얼자 예가 건너왔다. 그곳 권당들과 췬입산이라 하는 산에 들어갔다.

<큰절에 백 여명이 피신>
그 산에는 큰절이 비어 있었는데 이미 양반이며 상사람이 함께 들어 모두 백명이 넘었다.
여기서는 양식이 떨어져도 팔 것이 없었다. 누님의 반물(감빚)치마를 마저 팔아서 죽은 나락 13말을 받았다.
밀패(밀패=밀화) 갓 끈이 평시에는 값비싼 것임에도 그 때는 살 사람이 없었다. 가지고 다니다 못해 광주 목사에게 보내었더니 겨우 무명17필을 보내왔다. 그것으로도 끼니 이을 길이 없어 겨를 빻아 죽 쑤어 먹을 수밖에 없었다. 숟가락도 팔아 없앴던 까닭에 나무를 깎아 숟가락처럼 만들어서 먹으니 그 어려움이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마침 섣달에 또약기(질병의 하나)가 유행했다. 그 절에 있는 사람이 30여인이나 죽었다. 나도 그 병이 들어 가까스로 살아났지만 그로 말미암아 거기에도 더 머무르지 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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