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7)<제31화> 내가하는 박헌영(15) 박갑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첫국내잡인
극동인민 대표회의에 참석한 박헌영은 귀로에 「이르쿠츠크」에 들러 1주일 가량 머물렸다.
물론 「모스크바」에 갈때와 마찬가지로 같은 공책원인 김태연(단야) 임원근과 셋이서 행동을 함께 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가장 혈기가 왕성했던 이들은 다른 대회 참가자들보다 「모스크바」여행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은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박헌영 등 3명은 「코민테른」본부측으로부터 결정적인 사명을 받은 것으로 분석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코민테튼」당국은 소위 한국 공산주의자들이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나뉘어져 아귀다툼 하듯 파벌싸움을 하는 것을 무척 못마땅히 여기고 있던 때이었다.
그래서 대회의 회기를 이용해서 무원칙한 과당을 해산하고 새로운 범고려 공산당을 조직하도록 권유했다.
박헌영 등 3명의 청년들이 구태의연한 원로급들이 해외에서 파쟁만 일삼는 것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국내에 잠입해서 새로운 당조직을 결심했던 것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아뭏든 박 등 3명은 3월초에 「이르쿠츠크」에서 상해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내 국내에 침투할 준비를 마쳤다.
이들은 사실상 그들의 지휘자인 「이르쿠츠크」공산당의 상해지부 책임비서 김만겸으로부터 3백여원을 받고 그해 3월25일 상해를 떠났다.
상해부두에는 김만겸 등 여러 당 관계자들이 배웅하러 나왔다.
이들은 모두 검은 중국옷을 입고 안동행의 북해환을 탔다.
5일동안 배를 탄 박동 일행은 30일 용암포 이중합에서 미리 김만겸의 부탁으로 마중나온 사람에게 인도되었다.
마중한 사람은 포천 안동현에서 치봉양행이라는 강점을 경영하는 최준이란 자였다.
그들은 중국 윤극선(정크)에 옮겨타고 4월1일 안동현에 이르러 최준의 안내로 영빈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때까지 입고있던 시커먼 중국옷을 벗고 최가 갖다준 한복과 두루마기로 갈아입었다. 모두들 몇년만에 다시 입어보는 한국 옷차림이었다.
이들은 먼저 최의 심복인 증국인을 시켜 신의주∼경성의표를 3장 사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기네들은 가까운 의주군 위원면에 있는 백마역까지 장사일을 보러가는 것처럼 꾸몄다.
서울까지 간다면 안동이나 신의주역에서의 검문이 워낙 심하였기 때문에 검문을 피하기위해 짐짓 백마까지만 가는 체한 것이다.
하옇든 일행은 운좋게 압록강을 건너 백마역까지 닿았다.
그리고는 백마역에서 재빨리 서울까지가는 표를 바꿔갖고 당초 신의주에서부터 탄 것처럼 태연히 자리에 앉았다.
차가 몇정거장이나 지나갔을까 철산군 참면 차련관에 닿자마자 수상히 여가고 미행한 경찰에 그만 붙잡히고 말았다.
일행은 도로 신의주 경찰서에 끌러갔다.
결국 박 등 3명은 국내잠입의 첫 관문에서 붙잡힌 것이다.
이 때문에 국내 공산당 조직의 기도는 벽두부터 무너졌다.
이들은 일경에 체포된 이 후 신의주 지방검찰에 기소되어 신의주 지방법원 평양복심법원에서도 마찬가지로 징역 1년6월형을 언도 받고 복역 끝에 24년 1월 18일 출옥하게 된다.
출옥하자마자 20일 서울에 들어섰다.
당시 동아일보(1924년 1월22일자)에는 제2면에서 1단 기사로 『상해에서 공산주의를 선전했다는 일로 제작년 3월에 안동현에서 체포되어 제령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징역 1년반의 언도를 받고 그동안 평양 형무소에서 복역중이던 박헌영 임원근 김태연 3사람은 지난 19일에 만기 출옥하여 20일에 경성으로 왔다더라』라고 짤막하게 보도 되었다.
이 지면보도가 아마 박헌영의 이름 석자가 한국신문에 활자학 된 시초일 것이다.
주의자(당시는 사회주의 사상가를 흔히 주의자로 간략히 불렀다) 검거라면 큼직하게 보도하는 그 무렵의 신문도 박일행이 붙잡혔을 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가 석방된 뒤에서야 간단히 보도한 것이다.
주의자 잡기에 귀신같은 신의주 경찰조차 이들이 한낫 풋나기 사상가로밖에 여기지 않은 듯, 별로 깊은 관심을 쏟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3명이야말로 나중에·끈질기게 공산당 조직에 성공하는 두더지 3인조가 된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회로 미루겠으나 이들은 서울로 간 뒤 이내 청년단체인 신흥청년 동맹에 뚫고 들어가 차차 실권을 잡은 다음 이른바 조선 공산당을 조직하고 고려 공산청년회를 만들기까지 시종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면서 조직활동을 한다.
가위 불온 조직의 3총사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서울에서 선린상업을 나온 임원근은 전희에서 이력을 잠시 소개했지만 박헌영의 또 하나의 동료인 김태연(김단치)도 대단한 재사로 알려져 있다.
김은 추성 김주동 여러가지 필명을 갖고 문필 활동도 곧잘한 사람이다.
금능군 개령면 간부동 출신으로 별다른 학력은 없으나 꾸준히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관한 이론서적을 탐독하고 이론전개를 농사로 했다.
박헌영과 함께 고려공청을 조직한 주역의 1인으로 조선 공산당 사건이 터지자 용하게 도망쳐 상해와 소련에서 전전했다.
8·15 해방후에는 소련 과학원 한림학사의 한사람으로 이름이 전해졌으며 주로 소련 해외출판물(이론서적)의 한국어 감수원으로 활약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헌영 등 3명은 상해에서 고락을 같이하면서 기껏 공산주의 이론이나 조직 선동에 젊은 정력을 쏟았던 모앙이다.< 계속 >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