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택 숙청 바람 속 국장 예우한 김국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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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김일성(오른쪽)이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조직한 후 김책과 찍은 기념사진. [중앙포토]

처형과 국장(國葬). 평양의 두 얼굴이다. 장성택 처형(12일) 이튿날 김국태(89) 노동당 검열위원장이 급성 심부전으로 숨졌다. 그에 대한 국장이 16일 치러졌다. ‘피바람 속의 국장’이다. 김국태는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인 김책(1903~51)의 아들이다. 그는 북한 정권의 공동창업자급이다. 김일성은 그보다 아홉 살 많은 김책을 형님처럼 따르고 존중했다고 한다. 94년 김일성 사망 당시, 그의 집무실 금고 속엔 김책과 함께 찍은 사진 한 장만이 보관돼 있었다고 북한은 주장한다. 그런 김책의 장남이 김국태다.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킨 후 김책은 전장을 책임지는 전선사령관으로 나섰다가 51년 폭격을 맞고 숨졌다. 김일성은 그의 시신을 혁명열사릉에 안치했고, 이후 김책시와 김책공대 등을 만들었다.

 김국태는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통치 기간 승승장구했다. 1924년 함경북도 성진시(이후 김책시로 개칭)에서 태어나 김일성종합대학을 마치고 모스크바에서 유학했다. 귀국 후엔 인민군 중장과 김일성고급당학교 교장, 당 간부부 부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68년과 71, 83년 세 차례에 걸쳐 당 선전선동부 부장을 지낸 이 분야의 전문가다.

 외교파트에서도 역할을 했다. 에티오피아 대사(1977~82년)를 지내고, 김정일의 중국 비공식 방문에 수행하거나 김정일-푸틴 정상회담에 배석했다. 2000년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김정일 간의 정상회담 때는 김용순 노동당 비서, 최태복 최고인민회의 의장과 함께 비행기 트랩 아래까지 걸어나와 DJ를 영접하기도 했다. 심장이 안 좋았던 그는 99년 미국에서 치료를 받고 돌아오는 특전도 누렸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2009년 9월 당 중앙위 비서와 당 간부부 부장에서 해임되고 당 검열위원장으로 옮기면서 실권을 잃었지만 지난해 김정일훈장을 받는 등 원로로서 대접을 받았다. 당과 내각의 주요 간부들에 대한 인사 관리 노하우를 전수하며 김정은의 가정교사 역할을 했다는 얘기도 있다. 동국대 김용현(북한학) 교수는 “김책의 아들로서 상징성을 지닌 데다 모범적인 혁명 2세대로 평가받는 그의 국장을 장성택의 처형과 대비시켜 내부 결속을 다지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권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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