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2)제30화 서북청년회(4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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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서청을 같이 했던 동지들중 섕각키지 않는 사람이 없지만 그중에서도 일찌기 유명을 달리한 김성주·강시룡 등은 잊지못할 동지들이다.
김성주 동지 (평북 강계) 는 우리가 평청을 할때 벌써 사업부장으로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 서청에서도 사업부장·섭외부강을 거쳐 마지막에는 부위원장까지 맡은 일꾼중의 일꾼이었다.
그의 역할은 맡은 직책에서도 나타났듯이 사업을 통해 서청의 살림살이를 꾸려나가는 일이었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대북 첩보활동을 비롯, 각종 실력행위에 이르기까지 손을 안댄것이 없었다.
오히려 매사에 앞장섰다고 해도 좋을이만큼 그는 열심이었다.
실력행위의 첫 거사로 꼽고 있는 양평정 고무공장 습격도 실은 그와 반성환 훈련부장이 앞장이었고 용산 철도파업 진압때는 그가 선두에 서서 대원들을 직접 지휘했다.
양평정 출동때엔 사무실 (동아일보 3층) 에 남아있는 나를 못마땅하게 보고 『선우동지는 왜 안가느냐』며 갑자기 호통을 치는 바람에 내가 혼이 빠질 정도로 열성파였던 것이다.
확실히 그는 배짱좋고 박력있고 머리도 좋은 일당백이었다.
새벽 일찍 당시의 요인 집을 한바퀴 돌아와서야 아침을 먹었으며 어떠한 밀담좌석이라도 불쑥 뛰어들어 한다리 끼지 않고는 안되는 야심만만한 청년이었다.
이런 열성동지가 그뒤 잘못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비명에 갔다는 것은 서책 책임자의 한 사람으로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좌·우가 소용돌이 치던 당시 서책을 시대의 풍운아라고 한다면 그는 서책의 풍운아라고도 할 수 있다.
초기 서청때는 평북출신인 내가 단합을 위해 타지방 청년들을 우대하자 이에 반기를 들고 한때 나를 배척하는 풍파를 일으키는가 하면 대한청년단 합류 뒤엔 본부 요직에 못 끼고 외곽기구인 서북청년대 대장으로 밀려난데 불만을 품고 사무국장 윤익헌씨 추방운동을 벌이다가 쫓겨나기도 했다.
북진때는 평남지사 대리로, 그뒤엔 이박사를 지지하는 대한국민당의 사업부장 등을 하다가 하루아침에 장면박사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운동을 폈고 그도 안되자 이번엔 조봉암 대통령 후보의 선거 사무차장으로 일하는 등 그의 활동은 정말 거침이 없었다.
비명에 간 것도 모두 이같은 요란한 활동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는 우리들 서청간부의 구명운동으로 거의 풀려나게 돼있었는데 갑자기 죽음을 당했으니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강시룡은 평북 창성출신으로 평청을 같이한 동지 (정훈부장). 그는 일제시대 만주에서 정이위씨 (독립군 간부) 와 함께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가 해방뒤 선천에 나와 대동문화협회를 조직, 청년운동을 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북이 막상 공산당 세상이 되자 이번엔 이북 공산당은 가짜 공산당이라며 조민당으로 전향했다가 끝내는 배겨나지 못하고 월남, 우리와 반공운동을 했던 것이다.
이때문에 그는 부인 지여사로부터 『일제시대엔 공산당을, 공산당 세상이 되자 엉뚱한 조민당을 하니 당신은 언제나 안되는 일만 골라한다』고 놀림을 받곤 했다.
강동지는 1·4후퇴때 화물열차 지붕 위에 올라 피난을 가다가 온양 못 미쳐서 전선에 감겨 추락, 비명에 갔다.
강동지는 공산당 이론에 밝아 평청 당시 선전 및 행동방향에 많은 도움이 됐다.
이밖에 나와 같이 김구선생을 지지한 심돈섭 (창성), 방운원 (정주), 이규섭 (의주·임정 법무장관 최동우씨 비서)·임용태 (정주) 동지 및 여자대원으로 물불을 안가린 강소인 동지 등도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심동지는 창성 치안대장 (부대장은 강영훈 예비역 육군중장)을 하다가 월남한 사람. 그는 서부지부의 지도자로 경교장 앞에 지부를 내어 김구선생에게 여러가지로 도움이 됐으며 나중에는 강화도에 건너가 ?령 청년학원을 경영, 후진양성에 힘썼다.
또한 심동지는 강연솜씨가 뛰어나 YMCA 등에서 열린 각 단체 대표자 회의에서 언제나 인기를 끌었으며 압록강 동지회 회장이 되어 나를 여러모로 도와주기도 했다.
강여사는 청진태생으로 46년 9월5일 월남했다. 당시는 17세의 처녀.
월남직전 청진 고급여중 3년의 몸으로 교내서 백지동맹·수업거부 등의 반공활동을 주도하는 한편 인민위 사무실에까지 『북조선 인민위 타도하자』는 「비라」를 내다 붙인 맹렬동지이다.
강여사는 월남한 뒤에도 함북청·서청 부녀부 상임, 중부지부 부녀부장을 역임하며 남자들 못지않게 거리를 달렸다.
심지어 호림장 합숙소 시절엔 납치해온 좌익분자들을 발길로 차며 「린치」에 가담하기도 했다.
끝으로 운명을 달리한 동지의 명복과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는 옛 동지들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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