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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지원 작전(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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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공병>(1)
공병은 다른 병과와는 달리 「기술」과「전투」를 겸하는 준 전투 병과로서 도로를 보수, 확장하고 교량을 가설하며 축성 공사 등으로 보병 부대를 지원하는 본연의 임무와 더불어 때로는 직접 전투를 감행하기도 한다.
개전 초기의 우리 공병은 장비와 보급품이 너무도 미비했기 때문에 도저히 공병 본연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공병들은 도처에서 대전차 육박 공격반을 편성, 폭약을 걸머지고 적「탱크」를 향해 뛰어드는 대전차 결사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 같은 우리 공병들의 비장한 육탄 작전은 T-34 「탱크」를 앞세운 북한 공산군 기갑 부대 진격을 저지할 수 없었고 아군에는 소위 『「탱크」공포증』이라는 게 날로 번져만 갔다. 이 「탱크」병은 미군 당국이 6월말께부터 대전차 지뢰를 신속히 수원으로 공륜해서 우리 공병에 보급해 주고 또 적「탱크」들이 미 공군 F-51 전투기의 밥이 되기 시작하자 사라져 버렸다. 우리 공병은 낙동강 방어전까지는 한강교와 국도의 작은 교량들을 폭파한 정도의 본 임무를 수행한 외에는 주로 보병 전투를 전개, 구산동 전투를 비롯한 영천회전 등에서 전공을 세웠고 북진 때부터 서야 가교를 놓고 도로를 확장하는 둥 아군의 진격과 보급로의 연장에 따른 공병의 작업임무를 본격적으로 수행했다.

<이름뿐인 공병…장비 전무 상태>
공병의 정상적인 활동이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50년7월1일 미군 부대의 상륙과 더불어 대전차 지뢰·대전차 지뢰 「불도저」·석쇄기 등 물자와 장비 보급이 활발해진 대전서부터였다. 전쟁 발발 당시의 우리 한국군 군 공병의 총 병력은 2천5백50명에 불과한 부평의 제1공병단이 있었을 뿐이고 공병 학교와 각 사단에 공병대가 있긴 했으나 편제상의 인원만 채워져 있을 뿐 장비나 보유한 보급품은 거의 「무」였다.
54년6월25일 현재의 공병 1명에 대한 피 지원 병력 (보병 전투 요원) 비율은 1대 31이었는데 전쟁 중 공병의 대대적인 확장, 발전으로 51년에는 1대11, 52년에는 1대8, 53년에는 1대7로까지 증강되었다.
6·25 이전의 초창기를 거쳐 전쟁 3년 동안 확장, 정비되고 교육을 받아 실력을 쌓은 후 오늘의 참다운 건설 공병으로 발전한 우리 한국군의 공병은 많은 건설 사업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러면 6·25 초기의 우리 공병들의 활약상을 당시의 공병대 지휘관들로부터 들어보겠다.
▲윤태일씨 (당시 제1공병 단장·중령=예비역 육군 중장·전 서울 시장·54) <제1공병단은 공병 학교와 함께 우리 육군 공병의 요람이었고 수많은 부대 창설의 산파 역할을 했읍니다.
나는 49년6월20일 최창식 중령 (고인)이 최창언 대령 (전 한비 부사장)의 후임으로 공병감이 되면서 최 중령의 뒤를 이어 부평 제1공병 단장으로 나갔읍니다.
당시 우리 제1공병단은 5백52명과 7백32명의 병력으로 편성된 제9 야전 공병 대대와 제1 건설 공병 대대 및 창고·중장비·경장비·정비·「덤프·트럭」·철교 등의 직할 중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우리 한국군의 유일한 군 공병이었어요.
나는 6월20일 1개 소대를 지휘, 1사단 지역의 임진강 다리를 폭파하러 나갔다가 이미 적이 도하 중이어서 못 끊고 그냥 돌아와 버렸읍니다.
서울이 적의 수중으로 들어가자 부평의 우리 공병단은 모든 장비를 다 가지고 시흥으로 후퇴했다가 한강 방어전에 참가했지요.
이때 우리 공병 1개 대대가 한강철교에 배치돼 6·25 개전 이래 최초의 조직적인 보병 전투를 전개했는데 대대장 엄재완 소령이 적 탄에 맞아 부상을 했고 많은 병력과 장비를 잃고 말았어요.
우리 공병단은 수원서부터는 도로·교량 등을 폭파해 적의 진격을 늦추려는 지연 작전을 전개하는 한편 적「탱크」를 파괴하기 위한 육탄 결사대를 편성하기도 했읍니다. 나는 5명 1조의 특공대 10개「팀」을 편성, 장교 인솔하에 폭약을 지고 적「탱크」에 뛰어들도록 지시해 과천 쪽의 적진 깊숙이 들여보냈읍니다. 전과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떠나는 대원들의 사기는 아주 대단했어요.
내부관은 1개 분대를 지휘, 「지프」에 「다이너마이트」를 싣고 수원서 여주 쪽으로 나가다 적 복병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었구요.
사실 이 무렵에는 상황이 절박하니까 지휘 체계를 제대로 지키지도 못했고 그저 사방의 불을 끄러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소방대원처럼 적정이 나타나면 그냥 마구 달려나가 방어하는 거였어요.
나도 1개 소대를 직접 지휘해 용인∼여주 간의 도로에 대전차 지뢰를 매설하러 나갔다가 적이 수원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그대로 청주를 거쳐 대전까지 내려갔었읍니다.

<미에 대전차 지뢰 공급 호소>
나는 수원에 비래한 미 극동군 사령부 공병 부장이 제일 필요한 공병 보급품이 뭐냐고 묻길래 적 「탱크」를 저지하는 일이 시급하니 이미 공수키 시작한 대전차 지뢰를 더욱 많이 보급해 달라고 했지요.
7월초 평택으로 올라와 후퇴 중인 부대를 만나 병력과 장비를 대충 점검해 봤더니 많이 손실됐더군요.
여기서부터 우리 공병단은 일선 각 사단의 공병 대대들이 대부분 와해돼 버려 전선에 나가 지뢰를 매설하는 둥 사단 공병의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읍니다. 광범한 전선을 1개 공병단이 맡다 보니 병력이 부족해 본부 행정 요원까지 모두 나가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대전서는 미5공군이 공수해온 야포들을 우리 공병단에서 「덤프·트럭」 10여대를 동원, 비행장으로부터 일선 보병 사단에 끌어다 주기도 했읍니다.>
▲이만복씨 (당시 제1공병단 제9야전 공병 대대 작전 과장·중위=예비역 육군 소장·현 도로 공사 업무 이사·50) <개전 당시로서는 우리 제9야전 공병 대대가 한국군의 유일무이한 야전 공병이었읍니다. 장비라고는 겨우 「덤프·트럭」 5대 정도뿐이었는데 공병은 이런 상태에서 전쟁을 당한 거예요. 당시 공병창고의 재고 물자도 폭약 8만7천5백90㎏, 도화 색 4백3m, 대인 지뢰 7천6백개, 대전차 3백60개, 뇌관 9만9천2백m, 도폭 2천m 정도였는데 제1사단과 제7사단 정면으로 밀려 내려오는 적「탱크」 저지키 위해 재고의 지뢰를 모두 불출해 사용했으나 성과는 거의 없었어요.
당시 폭약류는 국내 생산이 안됐기 때문에 이나마 가지고 있던 재고도 모두가 군정 당시 진주했던 미군들한테 이양 받은 거 였지요.
그러나 6월28일 수원에서 동경으로부터 공수돼 온 대전차 지뢰 M-7 96개의 수령을 시발로 해서 미군 지원이 본격화하자 우리 공병은 물자의 빈곤을 벗어나 본연의 임무를 수행해 나갈 수 있게 됐읍니다.
군 공병인 제1공병단의 보급품에 대한 수입과 불출은 공병감의 명령을 받았는데 6월26일에는 창고의 휴대용 폭약을 육본 광장으로 수송해서 대구와 광주로부터 올라오는 제3, 제5사단 공병 대대에 용산역서 1천5백개씩 지급해 줬어요.
6·25 당시 제1공병단과 학교 및 각 사단 공병 대대 뿐이었던 우리 공병은 전쟁 3년 사이에 5개 야전 공병단과 3개 건설 공병단으로 확장돼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했옵니다.

<작전지에 폭약 공급 위해 온 힘>
제1공병단의 우리 제9 야전 공병 대대는 전쟁이 일어나자 수색∼능곡 간의 교량들과 임진강 철교를 비롯한 서울 주변의 교량·도로들의 파괴 책임을 맡았읍니다.
6월27일 새벽에는 부대 대장 고규연 대위가 대원들을 지휘, 광나루의 광진교를 폭파하는 둥 맡은 임무를 수행했지요.
최 대위는 28일 아침 수색 쪽의 작전 임무를 마치고 행주나루를 도하하던 중 적탄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어요.
나는 병력과 폭파용 폭약을 작전 지점에 보내 주는 일을 주로 했는데 25일부터 만 72시간 동안을 잠 한숨 못자고 꼬박 근무하다가 28일 아침에야 잠깐 눈을 붙였어요. 잠을 깨 보니 한강교가 폭파됐고 부대가 수원으로 이동을 시작하데요.
한강교 폭파는 6·25 전부터 공병 학교에서 실전에 대비해 늘 현지 교량 상에서 폭파를 위한 장약 설치 훈련을 해 왔었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절단할 수 있었던 겁니다 (본연재 제34∼37회 참조).
나는 수원에서 미군이 공수해온 고성능 폭약 6「파운드」씩을 배낭에 넣어 짊어지고 과천 쪽으로 적「탱크」를 파괴하러 나간 특공대 3개조를 시찰하러 나갔다가 아군기의 오폭으로 혼난 적도 있었어요.
7월 초순 나는 대전에서 2개 분대의 병력을 지휘, 차 2대에 5천「파운드」의 폭약을 싣고 나가 충남의 홍성∼서천∼홍산∼부여∼논산간의 교량과 백마 강변의 나룻배들을 폭파하라는 특수 임무를 부여받고 성공적으로 이 폭파 작전을 완수했읍니다.

<안동교 폭파로 수중 격투 전개>
부여에서 나룻배를 폭파하는데 벌써 적「게릴라」가 강건너에까지 들어와 우리한테 정면에서 총격을 가해 댑디다.
논산에서 대전으로 들어오려는데 이미 도로가 적 수중에 들어가 있어 하는 수 없이 전주∼남원∼함양∼거창을 거쳐 김천으로 올라와 농고에 주둔 중인 부대를 만났어요.
우리 공병단은 김천에서 다시 안동으로 후퇴, 대대 CP를 단촌에 두었는데 하루는 국군 복장을 한 기마병 5명이 의성서 안동까지 유유히 들어옵디다.
우리 3중대장 권태붕 중위가 단촌 지서 앞에서 이들 기마병들을 유심히 관찰하다가 말 잔 등뒤로 삐져 나온 총개머리판이 적의 다발 총임을 발견하고 정지시켜 모두 생포해 버린 일이 있었요.
안동교를 폭파할 때는 상황이 급해 아군이 완전 도하하기 전에 끊어 버렸는데 후에 도강해 오는 아군과 적병들이 뒤섞여 물 속에서 필사의 백병전이 벌어졌어요.
정말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처절한 광경이었어요. 물 속에서 서로가 『저놈 죽여라』라면서 아우성을 치며 물고 뜯는 수중 격투가 전개된 거예요.>
◇주요일지 (1952년10월27일∼30일)
※27일 ▲북한, 「유엔」 회의 참석을 안보리에 요청 ▲「트루먼」 대통령, 「아이크」 후보를 비난
※28일 ▲공산군, 24시간에 2만2천 발의 포탄 발사 ▲국회, 중석불 사건 조사 특위 구성
※29일 ▲「클라크」 사령관, 저격병 능선 시찰 ▲이 공보처장, 월북 작가의 작곡·가요 판금 조치 ▲일본의 제4차 길전 내각 성립
※30일 ▲광주 포로 수용소서 탈출 기도한 공산 포로 4명 사망, 7명 부상 ▲문교부장관에 김법린씨 신임 ▲한국군에 일인 기자 접촉 엄금 조치
◇알림=중앙일보에 3백76회까지 연재된 「민족의 증언」을 을유문화사에서 4권의 책으로 수록 발행하였는데 2주만에 초판이 매진되고, 현재 재판이 판매되고 있읍니다. 이 책 내용을 보시면서 느낀 의문이나 미심한 점, 그리고 비판이나 요망 사항이 있으신 분은 서슴지 마시고 서면이나 전화로 알려주시면 즉시 해답을 드리는 동시에 앞으로의 연재와 출판 계획에 반영 또는 참고토록 하겠읍니다.
책의 편집·사진·도표·인쇄·제본·장정·부피 등에 관안 의견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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