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러 '이유있는' 거부권 행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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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프랑스와 러시아가 미국 주도의 이라크 공격에 대해 거부권 행사를 밝힌 배경에는 국제사회의 주도권을 되찾고 실리를 챙기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미국 견제 나선 프랑스=프랑스는 미국이 결정한 이라크 전쟁에 들러리를 선다면 9.11테러 이후 노골화하는 미국의 일방주의 정책이 국제사회의 보편적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미국의 일방 독주를 막을 유일한 기구가 유엔이라고 믿는 프랑스는 유엔을 미국 견제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프랑스의 입장은 두 가지를 전제로 한 모험이었다. 무기사찰에 대한 사담 후세인의 협조와 국제사회의 지지가 그것이다. 이라크의 미사일 파기, 범지구적 반전 여론 등으로 비춰볼 때 두 전제가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뤄진 셈이다.

경제적 실리에 대한 계산도 깔려 있다. 프랑스는 2차 유엔 결의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에 따른 후유증을 우려하면서도 평화적 해결을 주창함으로써 이라크 전후 복구와 중동세력 재편에서 입지가 강화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실리 챙기는 러시아=러시아도 실리 외교의 큰 틀 안에서 거부권 행사를 결정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프랑스가 미국의 분노에 대한 방패막이를 해주는 상황에서 최악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도 미국에 맞서는 세력의 한 축으로서 자리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소련이 받지 못한 대(對)이라크 무기판매 대금과 유전개발 비용 등을 돌려받기 위해서는 후세인 체제 유지가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거부권 행사와 관련한 우려도 적지 않다. 러시아는 1999년 코소보 내 인종학살을 제재하기 위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에 반대했으나 결국 나토군이 안보리 승인 없이 무력개입에 나선 선례가 재현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이고리 이바노프 외무장관을 통해 거부권 행사 방침을 밝힌 것도 미국에 맞선다는 이미지를 희석하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파리=이훈범 특파원, 유철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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