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6)-서북청년회(3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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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살상전의 막간에 주고받은 통상「테러」중 주요한 사건은 전북신문(전주)습격, 전주전보청 습격 및 남원강연장 소동 등이었다.
이중 앞의 두 사건은 남선파견대축이 친 것이고 남원사건은 거꾸로 당한 것이었다. 모두 10여일 사이에 잇단 공방.
전북신문 습격은 사전에 통고를 하고 친 공공연한「테러」였다.
지부조직차 전주에 간 임일 대표가 우익 전라민보에 이북 진상기를 연재한데 대해 좌익계 전북신문에서『백주에 횡행하는 서청「테러」단 내전』이란 제목아래 헐뜯고 나선 것이 발단이었다.
이미 무더기 살상전까지 벌이고 있는 서청으로서 신문사 하나쯤 요리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트집을 잡는 날이 곧 깨지는 날이었다.
임일 대표는 즉각 전북신문 편집국장(정모)을 찾아가 전라민보에 실었던 이북진상기 원고를 내놓고 게재를 요구했다. 안될 줄 뻔히 알면서도 생트집을 잡기 위한 수단이었다.
정의 대답은 물론『안된다』는 것. 일이 예정대로 돼 회심의 미소까지 지은 임일 대표는 그 자리서『이런 신문은 필요 없다. 부서질 줄 알아라』고 곧바로「테러」를 통고했다.
당시 서청의「테러」가 얼마나 위세를 떨쳤던지 이날 정은『편집회의를 열어 다시 생각해 볼테니 하루만 참아달라』며 임일 대표의 소매를 잡고 늘어지는 등 웃지 못할「난센스」까지 빚었었다. 이유야 여하튼「테러」는 엄연한 범법행위인데 신문사측이 손이야발이야 빌고 들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터지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좌익계 신문이 이북진상기를 실을 수 는 결코 없는 일. 남선파견대는 이튿날『아무래도 안되겠다』는 회신을 받고 그 다음날 정오 당초 통고대로「테러」를 놓았다.
이날「테러」단(20여명)은 정덕수 도본부위원장이 직접 인솔했다.
이들은『인사차 왔다』며 수위영감을 속여넘기고 유유히 2층 편집국에 올라가 닥치는 대로 기물을 부순 뒤 활자판을 뒤엎고 윤전기에 모래를 쳤다.
눈뜨고 강한 전북신문은 며칠 뒤『서청「테러」단 두목 임일 장군, 백주에 신문사를 부수다』란 제목으로 호외를 발행, 악선전을 늘어놓았지만 이날의 피해를 끝내 복구하고 얼마 뒤 문을 닫았다.
임일 대표는 그 뒤 남선일대를 누비며「장군」으로 통했는데 그의 칭호가「대표」에서 「장군」으로 바뀐 것은 바로 이 전북신문의 호외제목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좌익신문이 장군이란 칭호를 선사한 셈이다.
3일 뒤 감행한 전주전매청 습격사건은 남선파견대의 실패작이었다.
당시 전주전매청(종업원 6백여명)은 전평의 아성.
임일 대표는 전북신문「테러」의 여세를 휘몰아 이 전매청까지 단숨에 정복하기 위해 70여명의 대원을 이끌고 쳐들어갔으나 좌익의 연락으로 긴급출동한 미 CIC에 쫓겨 5명의 부상자를 내고 물러나고 말았다.
전주전매청은 6월에 재차 습격해 겨우 탈환했다.
한편 전북신문 습격과 전주전매청 2차습격때 인솔책임자였던 정덕수 동지 및 수명의 대원들이 번번이 경찰에 체포돼 며칠씩 유치장신세를 졌다.
이때 체포에 가담했던 사람은 전주경찰서(서장 최연) 통신계장이던 동태훈씨.
그런데 이 동씨의 딸과 선우기성 위원장의 아들이 10여년전 결혼을해 둘은 뜻밖에도 사돈이 되고 말았다. 직분상 부득이 했겠지만 서청을 잡아넣던 동씨와 당시의 서청 최고 책임자가 맺어졌으니 세월의 조화가 아닐 수 없다.
남원피습은 서청측이 좌익들의 위장전술에 걸려「카운터」를 맞은 사건이었다.
남원지부는 그날 조광현 총본부조직부장(평북·조도전대졸·노인규 조직부장은 그때 충남도본부로 전임)을 초청, 농민회옆 일본요릿집 등미집에서 반공강연을 열고 있었다.
당시 남원의 많은 지방민들은 좌·우익에 대해 백지상태였다. 지도계급이라 할 수 있는 모문중의 대표까지『누대로 싸워온 조씨 가문이 우익을 하니까 우리는 불가불 좌익을 해야겠다』고 선언할 정도였다. 지부를 설치하자마자 이같은 실정에 부딪친 서청은 이날 서둘러 계몽강연을 마련한 것.
처음 강연장 안팎은 펑화롭기만 했다.
1백50여명의 청중들이 아무런 방해없이 참석했고 제시간에 강연도 시작됐다.
특히 40여명의 지부대원들이 경비를 맡은 강연장 주변엔 장꾼들만 바삐 오갈뿐 경계를 하고있던 좌익의 낌새는 엿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개회사 등에 이어 본연사인 조부장의 연설이 시작되는 순간 사태는 1백80도로 급변했다.
조금전까지 요릿집 앞을 오가던 수백명의 장꾼들이 일제히 보따리 속에서 죽장과 곤봉을 꺼내들고 강연장으로 밀어닥치는 것이었다. 정말 두 눈이 뒤집히는 둔갑이었다.
이들은 바로 남원인근의 민청·농민조합대원들. 장보러 온 촌민처럼 꾸며 강연장 주변을 맴돌다가 이쪽에서 안심한 틈을 노려 기습을 해온 것이었다.
감쪽같이 속은 대원들은 거의 전대원이 죽창에 찔려 부상했다.
서청은 그 뒤 청년연맹측의「코치」를 받아 밤마다 좌익계인사 집을 찾아다니며 무서운 보복을 했지만 이날 피해는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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