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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슨」과 월남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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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4면

「존슨」이 월남전 문제에 처음으로 깊숙이 개입한 것은 부통령 재직 시절이던 61년 5월게 이었다. 당시 그는「데일러」장군과 함께「사이공」을 직접 방문, 이른바「스탤리」-「테일러」계획을 작성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 때 작성된 이른바「특수전쟁」개념은 65년 2월「존슨」이 대통령의 자격으로 북 폭을 명령할 때까지 미국의 대 월남전 전략의 기동을 이루었다.

<테일러 계획을 작성>
또 이 때「존슨」이 세웠던 계획은 월남전에 대한 그의 첫 시책이기도 했다. 그는 월남 전역에 1만6천개의 전략 촌을 세움으로써 18개월 안에 평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으나 결과는 정반대였던 것이다.
63년 11월「디엠」정권이 무너진 지 20일만에 미국 대통령직에 오른 그는 2년 전 자신이 세웠던「특수전쟁」개념을 수정, 미 지상군의 직접 투입을 전제로 한「한정 전쟁」방식을 모색했다. 이것은 또한 미 군부의 요구이기도 했다.

<한정전쟁 방식 모색>
확 전의 서곡은 65년 2월7일「베트콩」의「풀레이쿠」기지 기습에 대한 보복으로 그 자신이 북 폭을 명령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뉴요크·타임스」지가 폭로한 소위「국방성 기밀문서」에 의하면 확전 계획은 이미 1년 전부터 치밀하게 작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북폭과 거의 동시에「다낭」「출라이」「안케」「캄란」등지에 사상 최대의 군수보급기지가 건설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어느 정도 증명된다. 처음부터 60만 대군을 움직이는데 필요한 준비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핵무기를 제외한 일체의 수단을 사용한다는「한정 전쟁」방식은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존슨」은 미군 증파와 확전 때마다 그에 필요한 구실을 찾아내는데는 성공 했으나 이것을 군사적 승리와 연결시키는데는 실패한 것이다.

<군사적 승리 못 얻어>
예컨대「존슨」은 의회로부터 월맹에 대한 군사력 사용의 백지 위임 권을 받아내기 위해 64년 8월2일의 이른바「통킹」만 사건을 이용했다. 그러나 이것은「풀브라이트」의원 등이 지적했듯이「날조는 아니라 하더라도 미국의 도발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 틀림없는 사건이었다.
「존슨」은 미국의 월남전 개입을 한국전 때처럼 하나의「국제 전쟁」으로 성격 짓기를 원했다. 한국「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태국 등의 파병은 그의 이와 같은 전략 때문에 이뤄졌던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차원에서의 잇단 성공에도 불구하고 전쟁 자체는 비극적인 소모전으로 장기화되었다. 사위를 전쟁터에 내보내는 등 그는 이 싸움에 정치 생명 외에도 많은 것을 걸었지만 그의 도박은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존슨」은「아시아」의 이름도 없던 나라에 50만 대군을 파견하고서도 군사적 승리를 거두지 못한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감수해야했다.

<의회저력 등 잘 무마>
그러나 이와 같은 불명예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치가로서의 수완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65년4월 첫 북 폭 금지명령을 내린 이래 그는 국내의 팽배한 반전여론과 의회의 압력을 그때마다 북폭 금지나 협상 제의 등 다채로운 방법으로 무마시켰으며 군부로부터의 압력도 훌륭하게 조정했던 것이다.
「존슨」은 월남 확 전의 주역이었을 뿐 아니라 휴전의 실마리도 자신의 손으로 마련했다. 68년 3월31일 북위 20도 이북에 대한 북 폭을 중지, 5월「파리」평화회담 준비로 월남 평화의 길을 열었다. <홍사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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