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 조각가 존 배 회고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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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배(66)가 돌아왔다. 열한 살 소년 배영철로 인천항을 떠났던 그가 장년의 세계적 조각가 존 배가 되어 인천공항으로 귀향했다.

지난 40여 년 미국에서 활동하며 한국인의 이름을 떨친 그는 ‘금의환향’이란 말에 “미술가가 된 것은 괜찮은 선택이었다”며 아이처럼 웃었다.

독립운동가였던 선친(배민수 목사)의 뜻을 잇지 못해 고민했던 젊은 시절, 아버지의 친구 한 분이 남긴 말을 그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한국이 잘 살도록 땅을 고르고 모를 심는 일은 우리가 더 잘한다. 너는 네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을 미국에 가서 펼쳐라. 그것이 우리 시대의 독립운동이다."

14일부터 5월 18일까지 서울 태평로 로댕갤러리에서 열리는 '존 배 조각, 공간의 시학'은 용접 조각으로 세계 조각사에 우뚝 선 그의 한평생을 작품으로 돌아보는 회고전이다.

스물 일곱살에 미국에서 손꼽히는 미술학교인 '프랫 인스티튜트'의 최연소 교수가 되어 전세계에서 모여든 조각가 지망생들을 지도하며 쌓은 다양한 체험이 스물네 점 조각들에 녹아 있다.

존 배의 조각은 미세한 세포 구실을 하는 철사 한 조각에서 출발한다. 굵은 바늘만한 철선을 셀 수 없을 만큼 되풀이 용접해 생긴 복잡한 망은 일정한 질서를 이루면서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언뜻 사모(紗帽)처럼 보이는 1988년 작 '양반'은 물성(物性) 속에 깃든 우리들의 잠재의식을 일깨우는 작품이다. 세부적인 형상 묘사가 없어도 존 배의 조각은 양반이라 불리는 이들을 시시콜콜 말하고 있다.

시각으로 잡히지는 않지만 이미 그 속에 있는 '짓'이 떠오른다. 얼음 속에 갇힌 물이 치솟아 오르는 듯한 78년 작 '겨울 시내', 한국 사람이 아니면 웃을 수 없는 93년 작 '개꿈' 등 존 배의 조각은 물질 또는 육체적 작용이 정신을 지배한다는 한 증거다. 하나하나 명징한 조각 언어로 모호한 정신을 명백하게 해석하는 그의 조각은 그대로 '공간의 시학'이 된다.

철선이 바투 다가앉아 이루어내는 색은 그저 검정이라 부를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색을 품은 듯한 검은빛은 하늘과 땅 색을 아우르고 자연과 인간의 성정을 비춘다.

존 배의 손에서 줄.판.덩어리로 몸을 바꾸는 철선의 영역은 넓다. 뜨겁게 달구면 말랑말랑해지고, 펄펄 끓이면 액체, 온도를 더 높이면 기체가 되는 꼴의 상상력은 자유인을 닮았다. 녹스는 것도 아름답다.

존 배는 "철선이 인간처럼 늙고 죽어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나요. 철선이 언어라면, 이런 언어를 가지고 장난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존 배에게 철사는 세계를 읽는 언어이자 생명체인 것이다.

전시를 기획한 김용대 삼성미술관 수석학예연구원은 "존 배의 작품은 평면에서 출발해 입체로 갔다가, 그 입체를 쭈그러뜨려 평면으로 만든 뒤 또다른 입체로 탈바꿈하는, 잠재의식의 변증"이라고 설명했다.

27일 오후 2시 전시장에서는 존 배의 작품세계를 논하는 '갤러리 강좌'가'프랫 인스티튜트' 제자인 신현중 서울대 교수와 김용대 연구원의 진행으로 열린다.

'존 배 조각'전 입장권으로 서울 순화동 호암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마인드 스페이스'전도 관람 가능하다. 어른 4천원, 초.중.고생 2천원. 02-2259-7781.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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