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송이 눈의 기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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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연말이면 신년을 바라보고 『내년은 올해보다 낫겠지』 하기를 몇십번을 거듭했던가. 하지만 실제로 나았던 내년은 한손으로 세기에도 모자란 것 같다. 그게 사람이 사는 것일까. 그렇더라도 조금 더 나을 도리는 없는 것일까.
이제는 나를 나로만 생각할 나이도 지났다. 사회 속의 나, 남과의 대인관계 속의 나, 그런 나가 아니고는 생각할 수가 없게 된것이 불혹이 안겨다준 결과라고나 할까.
말이 좋아 불혹이지 지금의 나같아선 혹 아닌게 하나도 없는 딱한 사정. 예같으면 불을 보듯 명백하던 것마저도 긴가민가 알수가 없게 된 것이 한심하다.
신년을 바라보고 우선 쏟아지는 넋두리를 막고 마음을 가다듬자니 떠오르는 것은 밀어닥치는 세파속에 갈팡질팡하는 초라한 나의 모습뿐, 어찌하면 정신을 차리고 과히 창피하지 않게 살 수 있을 것인가가 궁리의 촛점이 된다.
해야할 일은 있다. 학교서 해야할 일, 집에서 해야할 일, 또 배우는 사람으로서 영원히 해야할 일들, 우선 그것들을 충실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나는 것도, 그것이 전부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님을 이제와서 모른대서야 거짓말이 아니겠는가.
나는 굴러가는 커다란 눈뭉치속에 든 하나의 자그만 결정일뿐이니까. 한송이 눈이 또 그와 연결된 송이송이가 아무리 아름다운 결정의 꽃을 피우더라도 그것이 들어있는 뭉치가 시궁창에 빠진다거나 진흙 속에 굴러 깨어지고 이그러질 때 무슨 소용이 있을건가.
눈뭉치는 푹신하고 하얀 눈이 싸인 길을 대굴대굴 구르면서 살이 쪄가고 단단해지고 윤이 나야 송이송이의 결정도 힘껏 피운 꽃을 자랑삼을수 있지 않겠는가.
눈덩이여, 옳게 굴러가다오- 이것이 나의 신년의 기도요, 영원한 소망이다. 약속한다, 한 눈송이 나는 성의를 다해 힘껏 살아갈 것을.
그러니 나를 안은 너, 눈덩이여, 돌밭도, 진 개울도, 모진 나무그루 사이도 교묘히 빠져나가 저 창창한 하늘아래 해가 얼굴을 드러낼 때 찬란한 빛을 눈부시게 발할 수 있도록 해다오.
신이여, 당신 앞에 한송이 눈이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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