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먼」옹의 서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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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거의 3주일 째 중태에 빠진 채 투병 중이던 「해리·S·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이 26일 밤 향년 88세를 1기로 세상을 떠났다.
「트루몬」옹은 일찌기 미국의 상원의원을 거쳐 부통령과 대통령을 역임했고, 만년에는 회고록을 집필하며 조용히 세계를 관조하면서 천수를 다한 것이다.
옹의 생애는 금세기의 역사를 상징하며 그의 공헌은 세계적인 경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미 포병 대위로서, 그리고 변혁과 격동을 거듭한 제2차 세계대전 말기와 전후 냉전기에 있어서는 미 대통령으로서, 대내적으로는 「페어·딜」 정책의 게양을, 또 대외적으로는 이른바 「컨테인먼트·폴리쉬」(봉쇄정책)의 실천자로서 탁월한 경륜과 역량을 발휘했다.
고인은 또 미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서도 특히 한국과의 인연이 깊다는데서 한국민들의 머릿속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질 날이 없을 것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광도에 인류사상 최초로 원자탄을 투하(45·8·5)하여 전쟁을 결정적으로 종식케 했다. 이는 세계사상 하나의 불행한 기록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우리 한국민의 입장에서는 그만큼 해방을 빨리 해준 것이나 다름없다.
「포츠담」회담(45·8)을 계기로 소련의 팽창정책이 노골화하면서 동·서 냉전이 치열하게되자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단호히 저지함에 전력을 기울였다.
1947년 3월 「트루먼·독트린」의 선언과 더불어 마침내 「그리스」·「터키」에 대한 원조를 단행했으며, 48년에는 저 유명한 「마셜·플랜」을 실천했고, 49년에는 「나토」를 형성하는 등 일련의 세기적인 결단을 내렸다.
특히 고인은 6·25전란이 일어나자 한반도에서 전투의 즉각적인 종결과 평화를 회복함에 「유엔」회원국의 원조를 호소하는 「유엔」안보리의 결의를 통과시키도록 기민한 행동을 취했다. 그와 아울러 긴박한 사태가 증대됨에 따라 지체없이 미 육·해·공군병력을 파견, 우리를 지원했다.
옹의 부보가 전해지자 미국 조야는 그의 인품을 『해야만 할일을, 해야할 시기에 처리할 줄 아는 지도자』의 한사람이었다고 애도했다고 한다. 이 말은 특히 6·25사변의 발발에 대해서 「트루먼」의 즉각적인 대한 지원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던들 당시의 전국이나 세계사적 상황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라는 점에서 정통을 찌른 인물평이라 할 것이다. 물론, 그 반면 「트루먼」시대에 한반도가 분단되었을 뿐만 아니라 6·25를 미연에 방지 못한 점이라든지, 또 동란 중 제한전략으로 분단현상에 만족했다는 것 등은 한국민으로서 못내 아쉬움을 금치 못하게 하던 일이기는 하다.
만일 그가 「포츠담」에서의 대일 최후통첩을 할 때 통일된 한반도의 해방을 강력히 추진했었다면…, 또 6·25전에 미군철수를 단행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동란 중 「맥아더」 원수를 해임하면서까지 제한전략에 집착하지 앉았던들…하는 아쉬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후 냉전기에 있어서 한국과 서구제국·일본 등 자유세계 전체의 전후복구와 평화수호를 위해 그가 기여한 공훈은 그를 현대사 전체를 통해서도 뛰어난 인물로 특기할 것이다.
이제 국제조류는 변전하여 1세대 전의 「얄타」 지배체제는 개편되고 냉전체제가 용해되어 이른바 평화공존시대와 대화시대가 구가되고 있다. 결국 이 조류의 배경을 따지고 볼 때 그 심층에서의 작용은 「트루먼」에서 시작된 봉쇄정책의 골격인 『힘의 노선』때문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이러한 냉전시대의 종언과 인생무상의 진리를 상징하듯, 그는 고요히 눈을 감았다. 「트루먼」옹의 서거에 대하여 한국민으로서의 감회와 애도의 마음은 한결 간절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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