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9)<제자 정인승>|<제29화>조선오학회 사건(2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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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조선어학회사건의 발단인물이 되는 정태진이 홍원 경찰서의 소환장을 받고 떠나간 후 그의 얼굴을 내가 다시 본 것은 1944년 9월 중순 예심이 종결을 지을 무렵이었다. 그러니까 꼭 2년만에 그의 얼굴을 보게된 셈이다.
예심판서 나까노는 나의 진술과 정태진의 진술이 다르다고 하여 대질을 시켰다. 2년만에 본 그의 얼굴은 말할 수 없이 초췌해 있었다.
우리는 2년만의 감옥에서의 재회에도 반가운 말 한마디 나누지 못했다. 서로 반가움과 놀라움을 눈빛으로 교환했다.
나중에야 알려진 일이지만 조선어학회사건을 홍원 경찰이 문제삼게된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발단에서 였다.
1942년 여름. 홍원에서는 함흥에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함오영생여고는 사립학교로 꽤 알려져 홍원에서 통학들을 많이 했다. 홍원에서의 통학 학생들은 전진역까지 기차 속에서 잡담과 밀담을 즐겼다.
그당시 통학차에는 사찰계형사가 몰려 요시찰 인물을 조사하러 타고 다니곤 했다. 어느날 통학생들은 저희들끼리 무엇인가 그리며 옆에 사람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 소곤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몰래 그린 그림은 곧 태극기로 『우리나라의 국기』라고 소곤댔다.
또한 무궁화·독립 등의 말도 오갔다. 이들의 귓속말과 비밀로 그리는 태극기 그림을 눈치챈 홍원 경찰서 고등계는 불량학생검거에 손을 됐다.
철저한 일제의 주구노릇을 하고 있던 한국인 야스마 고등계 형사부장에게 제일 먼저 붙잡힌 것이 일본 명치대학을 졸업한 청년 박병엽이었다.
그러나 박병엽에게서는 이렇다할 수상한 것도 발견 못한 경찰은 박병엽의 방을 뒤지다가 그의 조카 박영옥이 쏜 일기책 몇권을 발견했다.
박영옥은 그때 함흥영생고녀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야스마는 여학생의 일기책이라 흥미를 느끼고 샅샅이 읽어가던 중 박영옥이 2학년때 쓴일기에서 『국어를 상용하는 자를 처벌했다』는 문귀를 발견, 이것을 트집잡기 시작했다.
그때 국어란 일본어로, 일본어를 사용한 자를 벌주었다는 문귀가 되므로 이는 반항적인 사립학교의 불법처사라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박영옥이 구속되고 그의 영생고녀동급생 이성희, 이순자, 채순남, 정인자 등이 경찰에 불려가 1주일 이상이나 고문 등으로 시달린 끝에 정태진과 김학준 두 선생이 민족주의사상을 학생들에게 불어넣었다는 사실을 자백하고 말았다.
김학준은 일본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영생여고에서 공민과 체육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정태진은 미국에서 철학과 교육학을 전공하고 귀국하여 처음에는 영어와 조선어를 담당했었으나 그 과목이 없어졌기 때문에 수학과 공민을 담당하며 9개년을 근무했었다.
그러나 사건당시 정태진은 나의 권유에 따라 영생고녀를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와 나와 합께 조선어사전 편찬원으로 같이 일을 하고 있었다.
경찰은 정태진을 이들 학생의 중인이란 명목으로 소환해다가 가두어 놓고 한달 가까이 갖은 고문을 다하여 그가 지금 일을 보고있는 조선어학회의 활동상황을 자백케 하고 이 학회를 구성하고 있는 회원이 모두 민족주의자들로 독립을 목적으로 암암리에 일을 도모하고 있다는 허위날조 자백을 받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조선어학회 사건을 홍원 경찰이 손대게되고 홍원 경찰은 경성경찰도 못하는 일을 우리가 했다고 자만하는 바람에 사건은 확대되었던 것이다.
실형을 선고받고 이극노·최현배·이희승, 그리고 나는 이틀 후인 1945년1월18일 즉시 고등법원에 공소를 제기했다. 정태진은 미결수로 재감하여온 2개년반 중에서 상당한 일수의 구류통산을 받아 약4, 5개월이면 만기출옥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공소를 포기, 복역키로 했다.
하루는 우리 공판의 주심판사였던 니시따 재판장이 불렀다.
그의 방에 가보니 이극노·최현배·이희승 등도 와있었다. 니시마는 우리 네사람에게 대접을 융숭히 해 놓고 『이번 사건은 이런 정도로 끝날 것이 아니라 중형을 내릴 것이었지만 최선을 다하여 최하의 형기로 결정한 것인데 공소를 하다니 그럴 수가 있느냐』고 따지면서『이곳에서는 말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옆방에 가서 네 사람이 의논하여 좋도록 하라』고 했다.
우리는 옆방으로 가서 그동안지낸 이야기만을 나누다 다시 니시마 재판장의 방으로 돌아가 『취하할 수 없다』고 한마디로 거절하고 말았다.
우리는 다시 독방으로 돌아가 미결수로서 고등법원의 공판날짜 통고만 오기를 기다렸다.
우리에게 상고취하권고가 실패하자 검사 사까모또는 1월21일 이극노·최현배·이희승, 그리고 나와 장현식을 맞상고했다.
그러나 한달이 지나고 두달이 지나도 고등법원에서는 이렇다할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우리가 공소를 고집한 이유 중의 하나는 공소를 하던 이 지긋지긋한 함흥 땅을 머나 서울로 갈 수 있게 되겠지 하는 기대에서였다.
그러나 5월 하순이 되어서야 겨우 고등법원으로부터 조선어학회 사건의 공소서류를 접수하였다는 통지가 왔다.
우리는 기가 막혔다. 이제야 접수가 되었다니 공판이 열리려면 또 얼마를 기다려야 하는지 까마득하기만 했다. <계속> 【정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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