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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자「스포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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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추위를 잠시 잊게 하는 화제. 한국과 중공사이에 탁구시합이 벌어졌다. 중공은 이미「핑퐁외교」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강호. 이들과의 대전에 한국의 연약한(?) 여성선수가 나섰다. 승리의 영광은 3대0「스트레이트」로 한국이 차지했다. 「스칸디나비아」에서 열린 「오픈」탁구선수권 대회의 복식경기에서 세운 기록이다. 복식뿐이 아니고, 단식에서도 마찬가지. 우리의 여자선수들을 당해낼「팀」은 없었다.
한국여성의 기백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대만의 대북 시에서 열렸던 「아시아」여자농구 선수권대회에서도 한국「팀」은 우승했다.
한 무렵에 동·서양에서 그 명성을 드높이 날렸다. 한국의 여성「스포츠」만은 그렇게 만만한 존재가 아닌가보다. 남성들은 차제에 분발할 일이다.
우리 나라에서 탁구가 공식경기로 등장한 것은 1924년1월이다. 그때 일인이 경영하던 경성 일일신문주최로 제1회「핑퐁」대회가 열렸다. 그 이듬해의 제2회 대회에는 무려 3백여명의 남녀선수들이 참가하여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여자탁구는 벌써 이 무렵부터 각광을 받았다. 경성여고의 이용렴 선수는 일본선수를 누르고 패권을 잡았다. 여자 탁구사의 영광스러운 한 「페이지」이다.
1927년5월2일의 소위 신궁 대회에선 우리 나라의 남녀선수들이 나란히 우승했다. 「일본 신궁」이 무색할 일이었다.
「대한체육회사」를 보면 한국에 탁구가 보급된 연대는 1918년으로 기록되어있다.
『「센터」를 잘 보던 K 군은 참 먼데에서도 구멍으로 잘 넣었다. 그 기술의 교묘함을 칭찬치 않은자 없었다』 .
이것은 1920년의 한 잡지에 묘사된 한국 청년의 농구광경. 우리 나라에 농구가 소개된 것은 그보다 13년을 앞선 1907년 봄. 황성중앙기독교청년회 초대총무였던 미국인「질레트」의 공헌이다.
당시 잡지들은 우리 나라 청년들의 실력이 동양 유일·세계 유일로 성장하리라고 평가했었다. 그 열매는 이미 몇 차례의 획기적인 시합에서 거둔바 있지만, 여자농구 선수들의 공헌이 더 컸던 것은 특히 자랑할만하다.
26일의 대북 시합에선 관중들의 열광이 지나쳐 시합이 중단되는 일도 있었다. 경기장엔「오린지」가 난비 했다고 외신은 전한다. 그래도 승리는 우리에게 돌아왔다.
해빙시대의 「스포츠」는 대외적으로 큰 역할을 맡고있다. 실상과는 달리, 그것은 친선과 화목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언젠가 우리도 그런「스포츠」외교시대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핑퐁」은 냉전의 해빙을 알리는 한 마리 제비의 역할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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