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병의 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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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왁자지껄하다 돌아가버린 오후의 텅빈 교실 안, 피로해진 몸을 잠시 의자에 기대며 창 밖을 멍청히 응시하고 있다.
초겨울 오후의 햇살이 따사롭게 유리창을 두들긴다. 어디선가 그윽한 꽃향기가 코에 스며든다.
웬 꽃향기가!
두리번거리다 교실 뒤편 구석에 시선을 멈췄다. 1년 내 꽃 한 송이 꽂혀 본 적이 없던 자리에…꽃병조차 구경할 수 없었던 교실이 오늘따라 환해졌기에 더욱 눈이 휘둥그래질 뿐이다.
누가 이 예쁜 국화꽃을. 교실바닥에 뒹굴던 우유병 속에 이 꽃들이 꽂혀지기까지엔 어린 꼬마들이 얼마나 꽃을 동경하고 가지고 싶어했는가를 말해 주고 있다.
국민학교 교실을 빌어 배우고 있는 우리들의 처지다. 그나마 지난 여름 장마로 판잣집에 물이 들어 요즘은 반수 이상이나 결석을 하고 있다. 그들 학교교실에서 버려진 꽃을 쓰레기통에서 주워 다듬고 종이 「테이프」까지 싸서 꽂아 놓고는 우리 반에도 예쁜 꽃이 있다고 환성을 올렸을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몰려와 한 글자라도 배워야 하겠다는 고운 눈망울들.
더러는 넝마주이. 구두닦이 통을 메느라고 못 배울 때가 있어도 점심을 굶어가며 참고 견디며 일어서려는 새싹들을 바라보노라면 한없는 기쁨과 함께 목이 꽉 매고 콧등이 시큰해져 눈물이 핑 돌아버린다.
개구장이들과 정 들어온지도 벌써 3년. 하루하루 몰라보게 달라지는 모습들 때문에 오늘도 피곤을 잊은 채 이 말직을 버리지 못하고 이들과 씨름하고 있는가 싶다. [김순길<서울전농공민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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