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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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10월 유신」이라는 말이 나왔다. 생소한 말이기는 하지만, 멋대로 만들어낸 말은 아니다.
시전에 보면『주수구방 기명유신』이라는 말이 나온다. 주나라가 비록 오래된 나라이지만 그 명맥은 날로 새롭다는 뜻이다.
또, 『지우문왕 기명유신』이라는 말이 간 보의 진기총론에 나온다. 『성정유신』이라는 말도 이 무렵부터 생긴 듯 하다.
「유」란 잇는다, 맨다는 뜻의 동사와 끈이라는 명사의 두 뜻을 가졌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그냥 발어의 조사 노릇을 할 때도 있다.「유신」의 경우도 그렇다.
「유신」은 사전을 보면『만사가 변개해서 새로워지는 것, 구폐를 일소하고 혁신하는 것』이라 되어 있다.
근대에 들어와서 이런 뜻의 유신을 제일 먼저 단행한 것은 대원군이었다. 그는 고종 원년 정월 10일에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유리시구하되 상하가 결탁하고 포저회뢰로 작위승사하니 일각에서는 직언을 들어볼 수 없고, 인사행정에 있어서는 공평을 찾아볼 수 없다…. 그리하여 생 민은 도탄에 빠지고 국 계는 애통하게 되었으니…. 이제부터 백관 이 속은 다함께 유신의 뜻을 품고 각자의 직책을 완수하라….』
대원군은 다음날부터 왕실·귀족들의 면세·전결 등의 국고환수, 독직 자들의 극형, 수뢰의 단속을 강행하였다.
그는 또한 군제를 개혁하여 국방력을 강화시키는 한편, 유림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원을 철폐케 하였다.
그뿐 아니라 색 의를 장려하고, 의관 복식을 간소화하고 풍기를 단속함으로써 일상생활의 근대화를 꾀하였던 것이다. 이른바「함여유신」이 바로 그것이다.
대원군의 이러한 교서가 나온 지 5년, 일본사람들도「명치유신」이란 말을 쓰게 되었다.
명치유신에서 특히 강조됐던 것은 사·농·공·상의 신분제를 철폐하는 사회혁명이었고, 또「교육칙어」가 상징하는 정신적 혁신이었다. 그리고 이런 게 근대일본의 기반을 이루어 놓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유신과 혁명과는 전혀 다르다. 혁명은 꼭 정권의 변 개를 전제로 한다. 또 그것은 정치적 개변만으로 끝나는 수도 있다.
여기에 비해 유신은 다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위에서부터 밑으로 미쳐 나가는 개신 운동이다. 따라서 정권의 변동을 반드시 전제하거나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유신에 있어서는 정치, 그 자체보다는 사회적·정신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혁신이 더욱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지명유신』의 올바른 뜻도 이런데 있다.
이렇게 보면 유신은「르네상스」를 연상시키지 않을 수 없다. 유신은 문화적·정신적인 「르네상스」의 풍토를 연상시킬 때 비로소 완결되는 것이라 봐야하겠기 때문이다.
그러니까「유신」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혁신의 기풍을 지속시켜 줄 수 있는 원동력이다. 그리고 그것은 위만이 아니라, 밑까지 퍼져나갈 수 있는 선열한 정신풍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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