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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9)<제자 이지택>|<제28화>북간도(19)|이지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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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3·l3 만세사건>
용 정의 3월 13일은 맑은 날씨에 바람이 불었다. 낮 12시 성당의 종소리가 신호였다. 이에 앞서서 전 북간도에서의 동포들이 장보러 가는체하고 속속 용 정으로 모여들었다.
명동에서는 아침8시에 학생들을 선두로 용 정으로 행진했다. 40리 길이니까 한나절 걸렸다.
이때 명동의 남학생들은 충렬대라는 것을 조직했었고 여학생들은 단지 동맹을 맺고 있어서 이른바 결사대였다.
이날 궐기에 참가한 동포의 숫자는 구구하나 1만명에서 2만3천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용정 시내 사람들은 악질적인 친일배만은 빼고 대부분 태극기를 준비해 갖고 집에서 성당의 12시 종소리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추밭에 마련된 식장에는 대회장 김영학, 회장 구춘선. 부회장 배형식 목사(감리교회)를 비롯 김서범 목사, 신학봉 강백규 마 진 장석함 등이 나왔다.
배 목사가 진행을 맡아 개회를 선언하고 김영학이 독립선언서를 읽었다.
이때 읽은 것은 북간도인사 17명이 한족대표로서 서명한 선언문이었고 국내서 보내온 선언문은 전단으로 뿌렸다.
이 선언문 낭독에 이어 만세를 외치는 것으로 식이 끝났다.
그런데 당초 중국측은 식만 올리고 행진은 하지 말도록 요구하여 우리측도 일단 이 안에 동의하긴 했었으나 만세가 천지를 뒤흔들자 군중 심리에서 상황이 달라졌다.
용 정의 일본 총영사관 앞으로 행진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자연 발생적으로 대열이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이때 나팔불며 선두에 서있었다. 어느덧 용 정 시내로 들어가는 어귀까지 왔다.
6열 종대로 서서가니 골목이 꽉 찼다. 길옆에 5층 대라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시천 교당인데 이 건물 앞을 지나서 5백m쯤 가면 일본영사관이 있었다. 이 탑 같은 건물은 폐허로 낮에는 어린이들의 놀이터인데 이 건물 앞을 지나자 중국군인들이 우리의 행진을 막는 것이었다.
한 중국 군인이 착검한 총으로 내 옆에 있던 양 고수의 복을 꽉 찔렀다. 양 고수라야 어린이었으니 금방 쓰러졌다.
그런데 이때 어디에선가 총소리가 났다. 뒤이어 오던 2만여 대열에 혼란이 일었다.
총소리가 계속되니 행렬의 앞뒤에서 혼란이 났으나 만세소리에 어디서 총소리가 났는지 몰라 우왕좌왕 했다.
총 첫 방에 명동의 충렬대 대원 김병룡(학생)이 즉사했다.
사격은 계속되어 대열은 흩어졌는데 이때의 사격으로 만세군중 I7명이 죽었다. 대부분 학생이었다.
이 순국 자는 김병룡·현봉률·정시익·차정룡·김종묵·최익선·박상정·채창헌·장학관·박문호·김승록·현상로·공덕흡·허준언·이유주·김흥식·김봉균 등이다.
이들은 용 정에서 명동 쪽으로 10리쯤 떨어진 허청리 뒷산에 국민회의 이름으로 안장되었다.
그런데 이날 총을 누가 쏘았느냐에 대해서 이론이 많다. 즉 중국군인이 쏘았느냐 하는 것이다. 내가 겪은 바로는 중국군인은 절대로 쏘지 않았다고 믿고 있으며 중국군 복장을 하고 잠입했던 일본 놈들의 음모이었다.
왜경들은 이날 빈집이던 시천 교당에 올라가 있다가 중국 경찰과 시위대가 마주쳤을 때 배후에서 총을 쏜 것이다. 이것은 사상자들의 몸에서 빼낸 총알을 감정한 결과 중국 육군의장 총알이 아니었고 일본의 권총 알이었음이 밝혀져 흉계가 드러난 것이다. 이때 사상자들이 나자「영국언덕」의 선교사들이 크게 도와주었다.
선교사중에 박 걸·구례선·부두일 선교사가 있었다. 박 걸은 A.H. Barker였고, 구례선은 Robert Creison, 부두일은 Foote였다.
구례선은 1898년 선교 차 서울에 왔다가 l899년에「캐나다」선교구인 원산으로 옮겼다가 그 뒤 성 진을 거쳐 용 정에 와 있었다. 연재 3회서 지적한 김정흥이 집 지으러 온 것이 바로 이 교회 짓는 일이었다. 박 걸·부두일도 다 마찬가지였다. 특히 제창병원은 부상자들을 치료해 주었는데 이 병원 원장은 민산해라는 의사였다. 선교사 아닌 민 원장은 다리를 절고 있었지만「스케이트」를 잘 타고 있었다. 이름은「스탠리·마태인)(Stanly Martain)이었다. 희생자의 시체도 병원에 안치, 보호해 주었다.
이때 박 걸 선교사 부처는 간호하는 한편, 시체에서 꺼낸 총알을 봉천·북경까지 보내 일일이 감식, 중국군의 장 총알이 아니고 일본 권총 탄환임을 밝혀내고 사진 찍어 각국 선교사와 공관에 돌려 일본의 잔학함을 폭로해 주었다.
민산해는 70년도의 광복절 표창 때 유공자로 단장을 수여 받았다.「캐나다」에 사는 딸이 와서 그 영예를 누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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