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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 패션 고수 족집게 과외 “너만의 것을 살려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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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2호 16면

1 글로벌 인큐베이팅 행사가 열린 맨해튼 브라이언트 파크에서 화이팅을 외치고 있는 한국 신진 디자이너들. 사진 왼쪽부터 김영균·김양훈·박용운·김지상·원지연 디자이너.

크게 되려면 큰물에서 놀아봐야 하는 법. 지난달 12일 야심만만한 국내 신진 디자이너들이 원대한 꿈을 품고 뉴욕 맨해튼으로 떠났다. ‘티키(Tiiki)’의 김영균, ‘유니온 오브제(Union Objet)’의 김양훈, ‘지세인트(ZSAINT)’의 김지상, ‘알쉬미스트(R.SHEMISTE)’의 원지연, ‘골든아이(GOLDENAI)’의 박용운 등 다섯 디자이너가 그 주인공. 한국패션협회가 산업통상자원부 후원을 받아 신진 디자이너 발굴·육성을 위해 진행하는 ‘글로벌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에 뽑힌 재원들이다.

신진 디자이너 5인의 뉴욕 패션 엿보기

이들에게 맨해튼은 거대한 ‘학교’였고 거리와 가게,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교과서였다. 덕분에 실용성을 챙기면서 자신만의 색깔을 잃지 않는 뉴욕 스타일을 몸으로 깨쳤다. 특히 뉴욕 패션 현장을 누비는 전문가들의 ‘족집게 과외’는 압권이었다. 이들의 현장 수업을 참관했다.

2 신진 디자이너에게 조언을 해주고 있는 뉴욕 바니스 백화점의 바이어 드류 칼드웰(가운데). 3 뉴욕 패션 전문가들의 조언을 듣고 있는 알쉬미스트의 원지연 디자이너(왼쪽 서있는 이). 4 멘토링을 위해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자기 제품의 전시를 준비하고 있는 디자이너들. 5 자신이 만든 옷의 매무새를 점검하는 골든아이의 박용운 디자이너.

질을 높이고 가격 올리라는 조언 많아
지난달 13일 맨해튼 최대의 패션거리 5번가에 위치한 백화점 ‘버그도프 굿맨’. 매장을 둘러보는 디자이너들의 눈이 매섭기까지 했다. 하나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표정도 진지했다. 김지상씨는 “한국 백화점은 브랜드별로 상품이 진열돼 있는데, 여기는 신발ㆍ가방 등 아이템별로 전시해 한 곳에서 모두 비교할 수 있게 돼 있다”면서 “이런 뉴욕 스타일에 맞게 디자인을 보완해야겠다”고 말했다. 원지연씨도 송아지 가죽을 뱀 가죽 느낌으로 가공한 소재로 만든 코트를 만져보며 “소재 발굴은 디자이너들의 영원한 숙제인데 이런 걸 보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른다”고 들뜬 얼굴로 얘기했다.

하지만 이들이 맨해튼에 온 진짜 목적은 단순한 탐방이 아니었다. 뉴욕에서 일하는 패션 전문가들에게 해외 진출, 특히 미국 진출에 대한 팁을 얻는 것. 브랜드를 론칭한 디자이너에겐 디자인뿐 아니라 생산·마케팅·전시·수출 등 전 과정을 조율하는 ‘경영자’ 역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날 이들에게 브랜드 마케팅과 미국 진출 전략을 조언한 이들은 뉴욕 백화점 바니스(Barneys), 최근 가장 주목받는 편집매장 ‘오프닝 세레모니(Opening Ceremony)’, 프랑스 브랜드 크리스티앙 디오르와 LVMH 등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었다.

뉴욕 바니스 백화점 바이어 드류 칼드웰은 김지상씨에게 “잘 팔리는 제품의 샘플은 튀는 색깔로 만들어서 바이어에게 와우 이펙트(Wow effectㆍ깜짝 효과)를 줘보라”고 귀띔했다. 굿즈&서비스 쇼룸의 조이 로렌티 대표는 김양훈씨에게 “판매 단위가 큰 미국에서는 아기자기한 트랜스포밍(디자인 변형) 디자인이 도매 판매에 번거로울 수 있다”고 충고했다.

질을 높이고 가격을 올리라는 조언도 많았다. 낮은 가격 때문에 브랜드 자체가 저평가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동대문에서 브랜드를 시작한 박용운씨는 그간 가격 경쟁력에 비중을 뒀지만 크리스티앙 디오르·LVMH 비주얼 머천다이저(VMD) 캐티 허킨스가 “소재와 마무리 부분을 업그레이드하면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고 한 얘기를 듣고 “한국에서는 저가 라인을 유지하고, 해외 진출 시엔 고급 소재의고가 상품으로 승부를 보는 투트랙 전략을 쓸 것”이라며 해법을 펼쳐보였다.

6 뉴욕 패션전문가들에게 가장 호평을 받은 지세인트의 김지상 디자이너(오른쪽)와 모델.

기성복 디자이너 경력에 모델 출신까지
치열한 경쟁을 거쳐 선발된 이들은 다들 탄탄한 내공을 갖췄다. 김지상씨는 남성복 브랜드 ‘솔리드 옴므’에서, 김양훈씨는 뉴욕의 패션학교 FIT를 다니다 국내외 기성복 브랜드에서 5년간 경험을 쌓았다. 둘은 세계 시장에서도 이름이 알려지는 중이다. 지세인트는 뉴욕의 편집매장 비헤이비어(Behavior)에 입점한 지 1년이 지났고, 프랑스·영국 등 11개국에 진출해 있다. 프랑스·홍콩에 진출한 유니온 오브제는 최근 프랑스의 유명 편집매장인 콜레트(Colette)와의 컬래버레이션을 제안받은 상태다.

박용운씨는 패션 모델 출신이다. 4년간 아르마니·구찌 등 명품 브랜드의 쇼무대에 서면서 익힌 소재와 디자인 감각을 활용해 직접 디자인한 옷을 동대문 도매시장에 내놨다. 박씨는 “모델은 누군가에게 선택받기를 기다리는 직업이지만 디자인은 내 것을 만드는 일이라는 점에서 끌렸다”며 “처음 시작할 땐 텃세가 심했는데 내가 디자인한 스웨이드 소재의 조끼가 히트치면서 동대문 상인들 사이에서도 인정받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원지연씨는 상명대 패션디자인과를 졸업한 후 스물네 살에 바로 브랜드를 론칭했다. 의류공장을 운영하는 아버지 덕에 어렸을 때부터 패션 외에 다른 길은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한다. 일행 중 가장 어린 원 디자이너는 신진 디자이너를 뽑는 TV프로그램 ‘톱 디자이너’ 시즌 1에서 10명 안에 드는 등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지난 10월 일본에 이어 내년 2월 뉴욕에서 열릴 아시아 패션 위크에 한국 대표로 참여할 예정이다.

힙합을 좋아하는 김영균씨는 화려한 프린트를 주제로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를 만들었다. “매니어층이 분명해 특별히 광고를 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가수 김현중이 우리 옷을 입고 TV에 나와 깜짝 놀랐다”는 게 김씨의 자랑이다.

7 독특한 프린트가 특징인 티키의 김영균 디자이너(오른쪽)와 모델. 8 신진 디자이너에게 캐리커처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뉴욕의 패션 전문가들. 9 프랑스·홍콩 등에 진출한 가방 브랜드 유니온 오브제의 김양훈 디자이너(오른쪽).

“신진에겐 국내보다 뉴욕이 더 열려 있는 시장”
최근 들어 국내 신진 디자이너들이 브랜드 론칭과 동시에 해외 시장에 눈을 돌리고 있다. 싸고 질 좋은 옷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국내 시장은 포화 상태가 됐기 때문. 게다가 백화점ㆍ편집매장 등에 입점할 경우 수수료를 내면서 직접 판매를 해야 하고, 재고 부담까지 있어서다. 해외에서 먼저 인정받아 한국으로 오는 게 유리하다는 전략이 나오는 이유다.

다섯 디자이너들은 이번 멘토링을 통해 충분한 가능성을 엿봤다고 말했다. 원 디자이너는 “뉴욕 패션계가 오히려 한국보다 더 열려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한국의 경우 브랜드와 디자이너의 인지도나 배경이 중요하고, 컬렉션도 단계를 밟아야 열 수 있는 데 반해 뉴욕에서는 디자인 그 자체에 집중하더라”고 들려주었다. 그는 또 “한국에서는 당장 이 옷이 얼마나 팔릴지에만 관심을 갖는데 뉴욕에서는 디자인의 정체성과 아이디어에 대해 가치를 둔다”고 덧붙였다. 김영균 디자이너도 “1년 정도 브랜드를 운영하면서 내 디자인 방향성이 맞는 건지 항상 의문이 들었는데 멘토들이 ‘너만의 것을 살리라’고 호평해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해외 진출이 처음인 김 디자이너는 “이제 해외 진출을 본격화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산업통상자원부 김일호 과장은 “이번 사업이 젊은 디자이너들이 쌓아온 저력을 해외 멘토들에게 보여주는 좋은 기회가 된 것 같다”며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를 배출하기 위해 지속적인 지원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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