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대통령의 입' 9년] 17. 잇단 북한 도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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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 1968년 1월 청와대를 습격하려다 사살된 북한 특수부대원들의 시신을 우리 군인들이 살펴보고 있다.

74세의 필자가 요즘 젊은 세대를 보고 안타깝게 느끼는 것 중 하나는 1970년대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70년대에 우리나라는 천지개벽한 것처럼 비약적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60년대 말부터 70년대 말까지는 또한 북한 정권의 무력 도발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그런데 젊은 세대는 이러한 두가지 역사가 자신들의 오늘날과 무관한 것인양 생각하는 것 같아 때로는 한심스럽기 이를 데 없다.

70년에서 80년까지 10년간 북한군의 휴전협정 위반사례는 5만1700여 건에 이른다. 말이 휴전이지 남북이 전쟁상태에 있었던 것과 다름없다. 김일성 정권은 휴전협정을 위반하는 각종 도발행위를 자행했고, 심지어 남한의 국가원수인 박정희 대통령을 죽이려는 시도까지 감행했다. 특수훈련을 받은 북한의 무장특공대가 68년 1월 21일 청와대를 습격하려 한 것이다. 생포된 김신조는 "박정희 목을 따러 내려왔다"는 진술까지 남겼다. 이같은 만행은 현대 문명사회에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그해 11월엔 울진.삼척지역에 북한 게릴라 120여 명이 침투하여 양민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의 목표는 남한 내에 이른바 해방지구를 구축하려는 것이었다. 새로운 침략전술이었다. 70년대에 들어서도 이런 식의 무력 도발은 계속되었다. 74년 8월 15일 문세광이 육영수 여사를 쏜 것은 사실상 박 대통령에 대한 두번째 살해기도였다.

북한 정권은 왜 이토록 박 대통령을 제거하려고 안달했던가. 이유는 간단명료했다. 박 대통령이 한국의 대통령으로 있는 한 주체사상으로 한반도를 통일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북한으로서는 남한의 경이로운 발전상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으며 남북 간의 격차로 말미암아 국가적 정당성이 북한보다는 남한에 더욱 강력하게 존재하는 사실을 두려워한 것이다.

북한은 이 시기에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데탕트(긴장완화) 추세를 감지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북한은 그래서 미리 박 대통령을 제거해 두어야 향후 한반도에서 논의될 것으로 예상되는 미군철수 문제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평소 국가안보를 댐의 수위 조절에 비유하곤 했다. "안보란 저수지 둑 위에서 위험수위를 미리 예측하고 대비하는 것과 흡사하다. 둑 아래에 사는 사람은 지금이 위험수위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 안보당국의 지시에 따르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은 일부 야당 정치인들의 안보 불감증에 대해 몹시 언짢아 했다.

박 대통령은 "김신조 일당의 시체를 보여주었더니 오히려 진짜 공비 시체냐고 묻더라"는 부대장의 보고를 인용하면서 "정부는 믿지 않고 북한의 선전방송은 믿으려 한다"고 개탄했다. 박 대통령은 대통령의 책무 중 가장 우선하는 것이 국가의 안전보장이라고 믿고 있었다. 헌법에 대통령을 국군 통수권자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성진 전 청와대 대변인·문공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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