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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0)<제28화>북간도(10)|이지택<제자 이지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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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명동 여러 집안>
김약연이 학교를 세운 것은 민족의 동량을 기르려는 원대한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육을 통한 민족운동이 실제생활로 다져져야 한다고 믿었고 이를 실천한 것이었다.
따라서 명동학교 자체가 뒷날 항일운동의 기지가 되어 3·1운동 후에 왜경에 의해 불태워 졌다.
여기서 김약연의 인물됨을 말해볼 필요가 있다. 뒤에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김약연과 관계 있기 때문이다.
김약연이 북간도에 이주한 것은 못살아서 간 것이 아니었다. 명동에 들어가는 길로 동가의 땅을 돈주고 사들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특히 밭 중에서 가장 좋은 곳을 골라 학전으로 내놓았는데 1910년께까지 약5만명이었다.(후손들의 증언)
차례차례 땅을 사 들이다가 나중에는 동가의 살던 집터까지도 사들였고 이 집터가 바로 규암재였던 것이다.
김약연의 교육은 철두철미 애국교육·민족교육이었다. 따라서 교내에서는 장유유서가 서릿발같고 심하게 표현하면 학교라기보다 독립군의 병영이라는 말이 옳다.
교육만 하고 가만있는 것이 아니라 간민회(뒤에 소개함) 등을 조직해서(물론 혼자서 한 것은 아니다) 동포들을 보호하려고 무척 애썼다.
뒷날 이야기지만 이런 일이 있었다. 1915년께인데 선생배척사건이 있었다. 학생들이 한 교사가 마땅치 않다고 스트라이크를 했었다. 김약연은 이때 학교에서 5리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가 한 교사가 급히 와서 보고하는 것을 듣고 분란이 난 것을 알았다. 김약연이 학교로 가자 학생들은 떠들다 말고 숙연해졌다.
교사를 나무랄지 학생들을 나무랄지 궁금하고 긴장된 순간이었다. 김약연은 한번 쭉 훑어보고는 운동장가에 서 있는 버드나무께로 길이가 굵은 가지 1개를 우드득하고 꺾었다. 천천히 가지를 다듬어 굵은 회초리를 만든 김약연은 바지대님을 풀어 자기의 종아리를 내놓고는 스스로 때리기 시작했다.
철썩 철썩 매 소리가 울렸다. 종아리를 힘껏 때리니 피가 났다. 회초리로 무엇을 할까 하고 궁금히 여기던 학생·교사·학부형이 모두 놀라 그 자리에 엎드렸다.
『선생님, 용서하십시오. 우리가 잘못했읍니다.』 사건관련자가 모두 자기 잘못이라고 뉘우침으로써 사건은 재판할 필요가 없이 해결된 것이었다.
김약연은 이처럼 내실을 다지는 인물이었고 감화로써 민족교육을 실시하려 했다.
이 김약연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 준 것이 김하규와 문병규 일가였다.
세 집은 대체로 같은 시기에 북간도에 이주해왔고 두고두고 깊은 관계를 맺었다.
김하규의 3녀에 김신묵 여사가 있다. 문재린 목사의 부인이다. 문재린 목사는 문병규의 증손자인 것이다.
따라서 명동에서 공부하는 학생이나 주민들로서 품행이 나쁘거나 게으른 사람은 당장 좇아냈다.
김약연은 자력갱생을 외쳐 언제나 스스로 거름을 만지고 밭을 일구는데 앞장섰다. 1907, 8년께인데 한번은 김약연이 명동에서 20여리 떨어진 칠도구의 산골에 들어가 화전을 일군 일이 있었다.
뒷날 이 골짝을 규암골이라 부르고 교회를 세웠지만 솔선 수범하는 것에서 무엇인가 동포들에게 감화를 주려고 했던 것이다.
1911년에 이동휘가 명동에 와서 사경회를 열어 여성교육을 역설했을 때 김약연은 이에 공감, 명동여학교를 세운 것은 말한 바 있거니와 여성교육도 민족교육, 독립교육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여 부지런히 일하는 정신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이 여학교가 생겼을 때 최초의 여교사로서 정신태 여인과 이의순이 있었다. 이의순은 이동휘의 둘째딸이었고 정신태는 정병태의 누이동생이다.
김약연의 이 같은 민족정신은 항상 행동으로 나타났다.
왜경에게 좇기는 독립군·지사들을 언제나 따뜻이 맞고 용기를 불어넣어 싸움터로 보냈다.
안중근은 김약연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안의사가 이등박문을 저격하기에 앞서 북만주를 헤매다가 명동에 들렀다는 것이다. 물론 김약연이 보호했다. 안의사는 문안골이라는 곳에서 권총사격연습을 했다는 것이었는데 그때 이등으로 여기고 총을 쏘아댔던 바위가 1920년께 까지는 있었다.
명동일대는 김약연을 중심으로 하여 뭉친 독립운동의 기지였기 때문에 왜경 압잡이들에게 밀고 당할 염려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보면 이 무렵 북간도는 태평하게 공부할 수 있는 곳 같지만 사실은 청국과 일본의 실랑이 속에 한국 동포들은 모진 고초를 겪는 것이었다. 북간도를 둘러싼 청국과 일본의 형편에 눈을 돌려보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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