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의 선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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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국정감사도 이제 중반에 접어들고 있다. 매일같이 감사를 받는 광경이 사진으로 보도된다. 꼭 검사 앞에서 피고들이 문초를 받고 있는 것 같은 광경들이다.
아무리 국회의원의 지체가 높다 하더라도, 또 아무리 국정 감사가 중요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감사 받는 쪽이 움츠리고 있어야 할 까닭은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정말로 떳떳하게 소신껏 일해 왔고, 양심을 숨길 일이 전혀 없었다면 말이다.
어느 감사 반에서나 의원들은 사실을 숨기고 있다고 호통을 치고 있다. 그러나 숨길 턱은 없다. 증언을 할 때에는 반드시 선서를 하도록 법률에 규정돼 있기 때문이다.
『양심에 따라 사실대로 말하고 무슨 일이든지 감추거나 보태지 아니하기를 맹세한다….』 반드시 이런 서약을 한 다음에야 장관이든 누구든 감사를 받게 되어 있는 것이다.
퍽 개명화 한 형식이다. 옛날 같으면 『천지신명에 맹세한다』고 했을 것이다. 서양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의 이름 아래…』 하며 성경 위에 오른 손을 엊어 놓고 맹세하기로 되어 있다. 회교도라면·풀론 「알라」의 신을 들먹일게 분명하다.
신의 이름을 빌 때에는 그 신을 믿고 있는 사람 사이에서만 통한다. 따라서 「그리스도」 를 믿지 않는 사람이 「그리스도」 의 이름을 들먹이며 맹세할 사람의 말은 믿기 어려울 게 틀림없다. 「천지 신명」이라는 말을 안 쓰게 된 것은 천신 지곤 을 믿는 「샤머니즘」이 이제는 통용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촌노들 앞에서 맹세를 할 때에는 양심이니「그리스도」니 하는 것보다 「천지신명」을 내세우는 편이 몇 곱 더 신빙성이 있을 게 뻔하다.
국정감사에서 「선서」라는 형식이 생긴 것은 서양을 본뜬 것이다. 다만 서양처럼 누구 나가 다 기독교를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양심에 따라」 라는 문구를 꾸며낸 것이다.
이런 문구가 효과가 있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양심이 있고, 또 양심에 따라 일한다는 믿음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서양에서도 진보적인 젊은이들은 요새 가령 결혼식을 올릴 때 판에 박은 기독교식을 따르지 않고 그냥 「양심과 사랑의 이름으로!」라고만 선서한다. 형식화한 종교적 신앙을 내세우느니, 양심이나 사랑과 같은 보다 충실한 것을 내세우는 게 훨씬 성실하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양심의 맹세도 그리 믿을 만한 것은 못된다. 양심을 저울질할 도리가 없는 바에야 몇 천 번이고 「양심」을 들먹인다고 조금도 가슴이 뜨끔해질 것은 없을 것이다. 양심이 없을 때에는 물론 더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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