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81)피 어린 산과 언덕(6)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김일성」·「모택동」 두 고지에 대한 한국 해병대의 공격은 51년7월10일 개성휴전 회담이 시작된 이래 정돈상태에 빠져있던 전선에서 적의 주방어선을 처음으로 치고 들어 간 전투였다.
김일성 고지는 좌우로 우리 육군 제5사단과 8사단 및 미 해병 7연대의 정면을 감제할 수 있는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 고지가 적의 수중에 있는 한 아군은 더 이상 진격할 수가 없었다.
공산군은 각 대대에 82㎜ 박격포 8문, 중무기 6문 등 소련제 중무기로 새로이 장비를 갖추고 이 고지를 끝까지 방어하려고 했다.
비록 해병대가 5일간의 단기작전으로 이 두 고지를 점령했지만 이 전투의 치열함이나 병력피해는 어느 전투에 못지 않게 많고 처참했다.
해병대가 김일성 고지 일대를 장악함으로써 5사단과 8사단·미 해병 7연대는 가칠봉을 비롯한 「펀치볼」지역 능선들을 용이하게 점령할 수 있었고 중동부 전선은 금강산을 앞에 바라보며 쐐기모양으로 적지에 깊숙이 들어가게 됐다.
모택동 고지는 우리 해병대가 김일성 고지를 점령한 여세를 몰아 하룻만에 점령해 버렸다.
당시의 참전 중대장·소대장들은 이 전투의 처절상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부상으로 자결기도 하기까지>
▲양복구씨(당시·해병 제1연대 제3대대 9중대장=중위·예비역해병대령·현 여한화섬 비상 계획 부장·48) <우리 9중대는 김일성 고지 공격 첫날 미군 지원 야포의 오발로 피해를 보고 빠져 나와 예비대가 됐읍니다. 다음날은 제10·11중대가 주공부대로 나서 맹렬한 공격을 가했으나 중대장이 부상을 당하고 뒤이어 지휘하던 선임장교 강길용 소위마저 전사해 버리는 등 막대한 인명 내고 별 진전이 없었어요. 이날 밤 대대 총공격전을 전개하는데 우리 측면 계곡을 타고 올라가 1백 「야드」 밑에 가 붙었읍니다.
여명공격개시 시간이 돼 일체의 화력지원은 오정근 소위한테 맡기고 전대원들에게 결사적으로 고지를 점령하라고 명령을 하고 나니까 막 적의 사격이 시작됩디다.
나는 계곡을 타고 올라가는 제1소대에 붙어 권총을 빼들고 진두지휘를 했읍니다.
고지 30여m 앞서부터는 수류탄전이 벌어졌는데 나는 여기서 적 수류탄 파편에 오른쪽 다리를 맞고 부상하고 말았어요.
기관총을 메고 올라오던 오정근 소위가 주저앉아 있는 나를 보더니 총을 내려놓고 붙들면서 엉엉 울데요.
빨리 나가 지원사격을 해줘야 한다고 오 소위를 설득해 보낸 후 나는 자결할 결심으로 권총을 빼서 안전「핀」을 풀었읍니다.
마지막으로 고지를 한 번 쳐다보는데 그 순간 우리대원들이 점령을 하고 환성을 올리고 있읍디다.
나는 감격스러운 나머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권총을 땅에 떨어뜨리고 김일성 고지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어요.
어느 사이에 연대본부 사병들이 들것을 메고 나를 후송하러 올라오더군요. 들것에 들려 내려갔더니 김동하 연대장이 얼싸안으며 눈물을 흘립디다.>
▲오정근씨(당시 해병 제1연대 제3대대 중화기소대장=소위·예비역해병준장·현 국세청장·45) <미 해병지원 야포의 「미스」로 내 소대도 45명의 대원 중 15명이 희생당했읍니다. 이날 밤으로 신병을 보충 받아 소대를 재편성하고 이튿날 다시 공격에 나섰읍니다. 김일성 고지는 적의 화망 구성이 아주 치밀하게 돼있고 특히 호 속에 묻어 포문만 내놓은 적 기관포 2문은 도저히 부술 방법이 없었어요.< p>

<특공대편성, 적 기관포 부숴>
김일성 고지 공격은 이 2문의 적포를 없애버리지 않고는 거의 불가능 했어요.
나는 하는 수없이 적 포진지에 뛰어들어갈 특공대를 편성했읍니다.
「바주카」포 2문·기관총 2정·소총수 5명으로 편성된 우리 특공대가 포복으로 측면에 올라가 붙은후 나머지 대원들은 일제히 정면포격을 하는 체하며 양동 작전을 전개, 적의 화력이 우리정면에 집중하는 틈을 타서 특공대의 「바주카」포가 적 기관포 진지를 명중시켜 버렸지요.
포가 들어있던 적「벙커」는 우리 특공대의 포탄을 얻어맞고 흙더미가 치솟으면서 박살이 나버리더니 사격을 멈추데요. 진격해 올라가 보니 북한 공산군 장교는 우리가 올라온 것도 모르고 권총을 빼들고 독전을 하구 있어 우리 대원이 사살해 버렸읍니다.
3일간의 혈전에서 막대한 피해를 본 우리 제3·제1 대대는 김일성 고지를 점령한 후 예비대로 나오고 모택동 고지는 제2대대가 계속해 공격해 나가 하룻만에 점령해 버렸어요. 우리 해병대는 모택동 고지를 점령하고 나니까 더 이상 공격해 나가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와 51년 l월초까지 두고지 방어전을 펴다가 서부전선으로 나왔읍니다.>
▲임경섭씨(당시 해병 제1연대 제11중대 1소대장=소위·현 해병대○○부대장·대령·41) <적은 김일성 고지 일대에다 대인 지뢰를 나무상자 속에 넣어 무수히 묻어놨었는데 탐지기로도 찾아낼 수가 없었어요.
밟으면 발목만 날아가 버려 우리소대도 공격 선에 도착하기까지 이 지뢰들에 걸려 7명이나 발목이 떨어져 나갔으니까요. 내가 이때부터 앞장을 서서 2m쯤 되는 몽둥이로 낙엽 속에 매설해 놓은 지뢰들을 두들겨 터뜨리면서 올라갔읍니다.
이렇게 해서 후속부대들은 비교적 지뢰로 인한 희생이 적었어요.

<피아의 시체로 시산혈하 이뤄>
첫날 우리소대는 아침부터 점심때까지 정면공격을 하다 실패하고 저녁때 측면의 물이 흘러내리는 골짜기를 타고 올라가 김일성 고지 앞의 무명고지에서 큰 혼전을 벌이다가 후퇴했읍니다.
이때부터 우리 11중대는 고지를 몇 번씩 빼앗고 뺏기는 술레잡기 식의 혈전을 거듭했어요.
3일째 되던 날의 마지막 공격 때는 중대병력이 34명밖에 안 남았을 정도였읍니다.
중대장교들중 3명만이 무사했는데 그중에도 2명은 전투도중 보충을 받은 사람들이었으니까 장교는 나 하나가 끝까지 남은 셈이었지요.
고지에서 적의 역습을 당해 다시 후퇴해 내려왔다가 또 공격을 해 올라가 보면 언덕을 기는 사이에 총구에 흙덩이와 돌이 들어가 실탄이 잘 안나갑디다.
그래서 내려갔던 적이 또 반격을 해오면 총을 못쏘고 수류탄을 집어던졌는데 적은 이때 총을 쏴대니 못 당하고 재삼 우리가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지요. 최후공격 때는 내가 34명밖에 안 남은 대원들을 모아 돌격준비를 시켜놓고 중대본부로 실탄보급을 받으러 가보니 중대장은 부상을 당해 후송됐고 무전병은 통신기를 멘 채 죽어 넘어져 있더군요.
무전기 수화기를 귀에 대봤더니 김윤근 대대장이 목멘 소리로 11중대를 부르고 있어요.
내가 관등성명을 대고 실탄과 식량을 보급해 달라고 했더니 저녁때 노무자들한테 지워보내 주더군요.
저녁놀이 질 무렵 중화기소대에 화염방사기 4대를 모두 동원해 집중 사격해줄 것을 부탁하고 돌격을 개시했읍니다.
고지위로 뛰어오른 우리 11중대 최후의 34명은 육박전을 벌였어요.
나는 「카빈」총구로 적을 마구 찔러 댔는데 나중에 보니 총구가 휘어졌읍디다. 병력을 점검해보니 4명이 또 전사해서 30명밖에 안남았더군요.
그 동안 고지 위에 쓰러진 피아의 시체는 수를 헤아릴 수가 없고 피로와 허기에 지친 우리사병들은 그 사이에서 그냥 누워 자는 거예요.

<1개소대원 7명만 살아남아>
실탄과 수류탄을 다시 보급 받고 방어태세를 갖추고 나니까 1개 대대의 적 병력이 나팔을 불며 역습을 해옵디다.
대대장한테 후퇴허락을 받고 나는 시체 사이에서 누워 자고 있는 대원들을 돌아다니며 깨워 총을 메워줬읍니다. 나중엔 『「레이션」을 준다』고 소리를 쳤더니 나머지 대원들은 벌떡 일어나 달려오데요.
이렇게 대원들을 집합시켜 가지고 다시 무명고지로 철수해 내려왔읍니다.
날이 샐 때쯤 측면에서 9중대가 육탄돌격으로 김일성 고지를 점령하더군요.
나는 이때 적 포격에 맞아 죽을 뻔했읍니다. 적 포격이 시작되자 한지섭 상사가 나를 덮치면서 빨리 자기 호 속으로 들어가자고 하는데 뒤를 이어 강두숙 일병이 또 덮칩디다.
이 순간 강 일병이 나대신 적 포탄 파편을 맞고 부상했지요.
전투가 끝나고 보니 우리 소대원은 7명밖에 안 남았읍디다. 돌격지점을 가보니 배낭은 38개가 그대로 있는데 이것을 멜 대원은 7명밖에 안돼 모두들 주저앉아 목을 놓고 통곡했읍니다.
나는 이때 네끼를 굶은 채 앉아 넋을 잃고 있었는데 경상을 입은 내 생명의 은인 강 일병이 기어오더니 「레이션」속에 들은 「파이내플」깡통을 따서 줍디다.
막상 한쪽을 꺼내 입에 넣었더니 영 넘어가지 않데요. 생존한 전우 7명을 모아놓고 한 조각씩 나눠먹고 또다시 부둥켜안고 울었읍니다. 우리 해병대는 이 무렵부터 전령은 까마귀를 잡아 먹이더라도 소대장을 절대 안 굶기는 전통이 생겼지요.>
◇주요일지(1952년5월23∼26일)
※23일 ▲미 공군, 평양대 폭격 ▲반민의 국회의원 「데모」 ▲미 육군성, 전거제도 포로수용소장 「도드」와 「콜슨」 두 준장을 강등
※24일 ▲내무장관에 이범석씨 임명 ▲경남·전남 북 일원에 비상계엄선포
※25일 ▲「미그」 4대 격추 ▲경향신문에 괴한 침입 ▲「네바다」에서 신원자탄실험
※26일 ▲휴전회담 한국대표에 이한림 준장 임명 ▲헌병대서 45명의 국회의원 연행
※알림=휴전회담과 병행 전개된 고지쟁탈전 당시의 관계자료나 사진을 갖고있는 분은 연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읍니다. 전화는(28)8211 (교환)의 74, 야간과 일요일은 (94)3415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