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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문단의 충격 두 거인 별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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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파리=주섭일 특파원】「프랑스」의 세계적인 비평가 「피에르·앙리·시몽」옹 (69)이 지난 20일 작고한데 이어 21일에는 소설가이며 극작가인 「앙리·드·몽테를랑」 옹 (76)이「파리」에서 권총 자살함으로써 「프랑스」는 이틀동안 2명의 「아카데미·프랑세즈」 회원을 잃었다. 이로써 지난 8월 작고한 「오스트리아」의 비평가 「에른스트·피셔」와 함께 20세기 「유럽」 문단의 3대 거성이 사라진 것이다.
『고발당한 인간』『20세기「프랑스」문학사』등 비평서를 남긴 「시몽」옹은 지난 11년 동안 「르·몽드」지의 문예 비평난을 담당했었고 최근 노환으로 은퇴,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후 작고했다.
1931년 유명한 「가톨릭」 실존주의 주창자인 「에마뉘엘·무니에」와 함께 「에스프리」지를 창간했던 그는 인간의 존엄성을 고수하려는 「모럴리스트」였으며 철저한 자유주의였다.
그는 『사회는 개인에 앞서지만 인문은 사회에 우선한다』는 인간관을 확립, 비평에서도 항상 인간의 성실성을 강조해 왔으며 사회 참여 문제에 있어서도 『참여하지만 절대 사회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사회관을 주장해 왔다.
22일자 「르·몽드」지에 남긴 『저자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서 『나에게 있어서 문학이란 단순한 오락이 아닌 더욱 중요한 과업이었다. 나는 문학이 인생과 분리되어 있다고 믿지 않는다. 문학은 그 자체가 의식을 지니고 있는 인생인 것이다』라고 말한 그는 문학과 인생이 같다는 정식을 강조했지만 보다 더 문학의 인간화 작업을 추구하지 못한 채 작고하고 말았다.
한편 귀족 출신이며 「가톨릭」신자였던 「몽테를랑」의 죽음은 그 동기가 『그 자신과 허무한 신의 존재에 직면, 자결함으로써 하나의 증언을 남길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나는 신앙을 갖지 않는다.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를 따를 하등의 이유도 없다. 이것은 굉장히 편한 일이다.』 이렇게 말했다는 그는 죽기 전 그의 비서 「코테」 양, 그의 친구이며 작가인 「미셸·드·셍·피에르」, 그의 유산을 상속받을 절친한 친구인 「바라」씨 등에게 3통의 유서를 남겼지만 아직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
「몽테를랑」이 죽기 직전 마지막 대화를 나눈 사람은 화가 「에드아르·M·아보이」였다. 「아보이」씨는 바로 그날 그의 작품 『사내아이들』의 「데셍」을 보여주고 상의하기 위해 「파리」 7구 「볼테르」로 25번지의 그의 「아파트」로 찾아갔었다.
이 대학에서 「몽테를랑」은 『나는 이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소. 나는 죄수가 된 것이오. 나는 거리에서 밤이면 나를 사로잡는 두려움과 꼭 같은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소. 친구여, 나는 두려운 것이오!』라고 말하고 『우리들이 지금까지 지켜온 인간의 가치가 우롱 당하고 헐뜯기는 이 시대 앞에서 당신은 정말 용기를 잃지 않는 것입니까?』고 되물었다는 것이다.
「아보이」는 그때 그에게서 어두운 그림자와 정적, 절망은 동시에 발견, 이미 그의 죽음을 예감했다면서 『그후 그와의 이 짤막한 대화가 내 생애의 가장 긴 하나의 투쟁이었음을 깨달았다』고 말하고 있다.
「몽테를랑」은 지난 20년 동안 모든 식사를 그의 「아파트」 바로 옆에 있는 「레스토랑·프레가트」에서 했다. 「레스토랑」측은 이 위대한 노 작가를 위해 그가 편안히 앉아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붉은 상보를 씌운 특별 식탁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이 「레스토랑」의 여 종업원 「루이지에트」는 사실상 「몽테를랑」과 터놓고 얘기를 나눈 유일한 여인이었다. 『인간이 생명에 대한 존경심에서 자살한다는 것을 아는가」라는 그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면서 그녀는 울먹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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