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78)-<피어린 산과 언덕>(2)「6·25」22주기…3천여의 증인 회견…내외자료로 엮은「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두솔산 전투>(1)고지쟁탈전
적의 춘계 공세가「유엔」군에 의해 분쇄되고 주「유엔」소련 대표「야콥·A·말리코」가 한국전의 휴전을 제의할 무렵인 51년6월 중동부 전선의 두솔산 일대서는 우리 해병대와 공산군간에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벌어졌다.
공산군이 난공불락을 호언하던·인제 북방 만대리 분지(일명「펀치볼」) 일대를 둘러싼 능선에 위치한 두솔산 지구의 여러 고지는 전략적 위치나 지형으로 보아 아군이 절대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즉 아군이 양구와 인제로부터 북상하는 도로를 끼고있는 이 지역을 확보치 못하면 좌우의 전선이 더 이상 진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이 돌출지역 때문에 적에게 포위 당할 우려도 없지 않았다.
공산군은 견고한 진지를 구축해 놓고 최강을 자랑하는 그들의 제5군단 12사단과 32사단을 배치해 아군의 공격을 필사적으로 방어했다.

<돌과 바위 선혈로 붉게 물들어>
1개 여단 병력에 가까운 우리 해병대는 l천m전후의 고지들이 중첩돼있는 두솔산 지구에서 강우와 농무로 초기엔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2주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마침내 24개 목표고지들을 완전 점령하고 개가를 올렸다.
이 지역을 담당했던 미 해병 제1사단이 공격에 실패하자 교체해 들어간 우리 해병대는 야간 기습 작전을 전개, 적진지들을 육탄 돌격으로 무너뜨린 것이다.
해병대는 두솔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그 용맹을 국내외에 떨쳤고 『귀신도 잡는 한국해병대』라는 격찬을 받았다.
그러나 두솔산 일대의 대소 24개 고지들을 점령할 때마다 벌어진 육박전은 피아간에 무수한 인명 피해를 내야했고 돌과 바위들은 선혈로 붉게 물들었다.
51년6월4일 아침8시『여하한 난관이라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자만이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연대장 김대식 대령의 훈시에 이어 우리 해병대는 총공격을 개시했다. 이 공격에 앞장섰던 대대장의 이야기.
▲공정식씨(당시 해병 제1연대 1대대장=소령·예비역 해병중장·전 국회의원·48)<「아먼드」장군이 지휘하는 미제10군단 각 전지역인 두솔산 일대는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선 천연의 요새지였습니다.
우리 해병대는 51년6월초 이 일대서 완강한 저항을 하고있는 북한 공산군 2개 사단에 공격을 가하던 미 해병 제1사단과 임무를 교대해 들어갔어요.
당시의 두솔산 전투는 우리 해병대로서는 창설이래 처음 겪는 가장 치열한 전투였지요.
우리가 이 지역에 투입된 동기는 미 해병대가 고전을 거듭하면서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자 미8군사령관「밴플리트」대장이「아먼드」10군단장에게 한국 해병대를 들여보내도록 종용한 모양이예요.
매일같이 내리는 비와 안개 때문에 작전에 애로가 많았습니다.
전투는 미 해병대 전속 지원기인「코세어」기와 함포 지원을 받으며 수류탄전과 육박전으로 한치한치 기어오른 문자 그대로의 혈전이었어요.
바위 너머로 수류탄을 까서 던지고 또 적 수류탄이 날아오면 되받아 던지면서 기어올랐으니까요.

<바위틈에 낀 적 공격에 큰애로>
내가 지휘한 제1대대는 1천2백여명의 사병들 중 80%가 제주도 출신 학도병들이었는데 그들의 용맹성과 지구력·애국심은 정말 감탄할 뿐이었어요.
동작은 좀 느린 편이지만 일단 적과 붙으면 끝까지 끈기 있게 달라붙어 싸웁디다.
이들은 입대서부터 전투와 훈련으로 10여 개월을 시달려 왔었는데 이때쯤에는 아주 강력한 군대가 돼 있었어요.
두솔산 작전은 한국 전쟁 중 최초로 우리가, 연대 단위의 대규모 야간 기습작전을 감행했다는데 큰 의의가 있습니다.
이 때까지는「유엔」군은 서간작전, 공산군은 야간작전을 주로 한다는 게 상식화돼 있었지요.
바위틈에 끼여있는 적들을 공격하는데는 항공지원도 큰 효과가 없었고 서간의 정면 공격으론 도저히 안됩디다.
나는 작전회의에서 공산군이 야간 작전을 하는데 왜 우리는 못하느냐고 야간 기습전을 강력히 주장했어요. 미 고문관은 처음엔 탐탁지 않게 여기며 고개를 갸우뚱하데요.
산 속의 험악한 협로에 수 없이 매설해 놓은 적 지뢰는 야간 작전에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우리 사병들의 발목이 이 지뢰 때문에 많이 날아갔어요.
한창 작전 지휘를 하고 있는데 옆에 서있던 내 부관 임병륜 중위가 적 박격 포탄을 맞고 산산조각이 나버립디다.
나는 형체도 찾아볼 수없이 산화한 임 중위의 전사에 자극을 받아 미친듯이 뛰어다니며 지휘를 했어요. 전사한 2중대의 통영 출신 한 사병 시체 호주머니에서는 애인한테 써놓은 편지가 나오기도 했어요. 답장 형식의 편지 속에는『내가 두솔산 전투를 무사히 마치고 살아서 당신을 만날지 모르겠다』는 애절한 내용이 담겨있더군요.
그때 고지에 기어오르는 장교나 사병들은 모두가 전사나 부상의 공포증(?)에 떨었던 게 사실입니다. 이런 육박전 때 무섭지 않다는 것은 거짓말이지요.
우리 1대대는 적「토치카」에 수류탄을 까 넣으면서 16일 동안 서야간 전투를 계속한 끝에 적 1천1백여명을 사살하고 23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고 목표 고지들을 완전 점령했습니다.
혼전이 벌어질 때는 대대장도 소대장 위치까지 나가 전투를 지휘했어요.

<최악의 전투에 미 병사 울기도>
나는 연대본부에서 작전 회의를 하고 돌아가다 매설해 놓은 적의 대전차 지뢰를 밟아 허리에 부상을 당하고 죽을 뻔했습니다.
내가 탄「지프」는 ⅓쯤이 완전히 없어지고 나는 날아가 논바닥에 떨어져버렸어요. 연대장이 애로가 없느냐고 물으면 늘 그저 술이나 한병 보내달라고 했지만 내심은 걱정이 태산같았지요.>
▲오정근씨 (당시 해병 제1연대 제3대대 중화기 소대장=소위·예비역 해병 준장·현 국세청장·45)<화천에서 제3차 춘계 공세를 취해온 중공군과 격전을 치르고 5월말 미 해병1사단과 진지를 교대하러 두솔산으로 들어갔습니다.
고지와 능선에서는 황토 투성이의 다 해진 작업복을 입은 미 해병들이 3.5m포탄을 어깨에 메고 운반하고 있습디다.
어린 미 군병 하나는 주저앉아 엉엉 울어대고 있어요.
우리들은 그 병사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서투른 영어로 격려를 해줬어요.
우리 3대대는 제13목표 고지에서 격전을 치렀습니다.
두 차례에 걸친 공격에서 실패하고 6월9일 다시 비장한 각오로 대대 공격에 나섰어요.

<총구가 시뻘겋게 달아 불덩이>
사병들은 자꾸만 비를 피하려고 한데 모이고 적은 이 같은 밀집을 노려 포격을 가해오는데 정말 못 견디겠더군요. 9일 아침 우리 중화기 소대는 옆의 제2 소총 소대를 지원하며 공격에 나섰어요. 돌격선 10여m를 남겨놓고 2소대장 김문선 소위가 적 다발 총을 맞고 전사해버렸어요.
우리는 저녁때까지 백병전을 계속해 고지를 완전 점령한 후 즉시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숙영에 들어갔습니다.
나는 전초 뒤의 호 속에서 잠을 자고있었는데 새벽3시쯤 되니까 북한 공산군이 피리를 불고 북을 치며 올라오더군요.
어느새 우리전초 방어 진지는 무너져 버렸고 적의 함성이 자꾸만 가까와집디다.
나는 중화기 소대의 화력을 총동원해 방어전에 나섰습니다.
기관총 사수가 적탄을 맞고 쓰러지자 선임 하사관 이 상사가 뛰어나가 쏴 대더군요. 이 상사도 잠시 후 머리에 적탄을 맞아 전사해버렸어요.
하는 수 없이 내가 사수가 돼서 쏴댔는데 기관총 방아쇠 받침 손잡이가 적탄에 맞아 날아가 버리고 없어졌어요.
방아쇠만 손가락으로 감아쥐고 쏴대는데도 총알은 잘 나가더군요.
실탄이 들어 붙고 더 이상 안나갈 정도로 총구가 시뻘겋게 달아 불덩이인데도 요행히 잘나갔어요.
새벽 안개가 덮여 1m앞도 안보이고 비가 내리 퍼부어 도저히 사격목표물을 분간조차 못하겠더군요.
먼동이 트고 안개가 걷히자 공산군은 후퇴 나팔소리에 맞추어 물러가더군요. 전과를 확인하러 나가보니 산비탈에는 적 시체가 50여구, 야포 등 각종 총기가 40여정이 나뒹굴고 있습디다.
기관총이 끝까지 버텨 주었기 때문에 진지를 사수할 수 있었지요. 적은 뺏긴 고지를 탈환코자 1개 대대 병력으로 맹공격을 가해왔던 건데 우리는 겨우 1개 소대병력으로 이를 방어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기관총만 고장났더라면 우리는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생사초월…고지 점령에 안간힘>
▲양동익씨(당시 해병 제1대대 1중대 사병·현 제주역 서귀 전매서장·40)<2백여명의 중대 병력이 제3목표 고지를 탈환하고 나니까 60여명밖에 안 남았습디다.
비행기로 수송돼온 신병들이 보충돼 아침에 신고를 하고 올라가면 저녁때는 거의가 부상을 당해 들것에 실려 내려왔어요.
우리 사병들은 이런 전투를 계속하다가는 우리 해병대가 다 없어지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데요.
제1목표 고지는 제1대대에서 1개중대 병력으로 공격한지 하룻만에 완전 점령을 했어요.
첫 전투에서 이 같은 개가를 올리고 나니 모두가 사기가 드높아졌었지만 제3목표부터는 고전을 거듭했습니다.
어느 중대서는 고지를 점령하고 감격에 겨워 만세를 부르며 해병대 노래를 합창하다가 후퇴해가던 적의 기습공격을 받아 많은 부상자를 내기도 했어요.
당시 우리 사병들은 대부분이 제주도 학도병들이었는데 전투를 학교에서 하는 운동시합같이 생각하고 진격에만 열중했어요. 죽는 것이나 무서운 것을 무릅쓰고 학생기분에서 전투를 한 것이지요.>
◇주요일지(1952년5월11∼14일)
※11일▲인도총선,「네루」파 대승 ▲「베를린」사태 긴장
※12일 ▲미 공군 .하루에1천59회 출격 ▲장 총리, 요정출입 공무원을 파면·정직 처분
※13일 ▲「미그」기 13대 격추파 ▲신흥우씨 대통령 출마 성명
※14일 ▲금화 서북방서 격전 ▲「보트너」신임 거제도 포로 수용소장 착임 ▲국회, 서 대위 사살로 구속된 서민호 의원 석방 결의안을 95대0으로 가결 ▲강기일 외상, 재한 일본 재산 청구권 보유 주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