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 끄는「작가 철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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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지난 5월11일 별세한 철기 이범석 장군의 중국어 장편소설『북극 풍경화』의 국내 출판 (김광주 역)을 계기로 문단에서는「독립투사며 정치가였던 철기」에 앞서, 「유능한 작가로서의 철기」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시도되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문단가로서의 철기의 능력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인정돼 왔다.
해방후인 48년 그의 중국어로 쓰여진 중·단편 소설집 『방랑의 정열』이 작가 송지영씨 번역으로 출판되어 화제를 일으킨 일이 있으며 그가 작고하기 얼마 전에는 회고록『우둥불』로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바 있다. 그러나 그의 본격적인 문학적 재능은 회고록이나 중·단편에서보다는 오히려 장편에서 더욱 생생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북극 풍경화』를 계기로 한 철기 측근과 몇몇 문인들의 견해다.
송지영씨에 의하면 철기는 해방 전 독립 운동에 몸바치고 있을 무렵 이미 많은 중국어 장편 소설들을 남겼다고 한다. 7, 8권에 달하는 이들 장편소설들은 철기자신이 집필한 것이 아니고 그의 구술을 중국인 소설가가 받아 써 책으로 낸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구술이 거의 완벽한 문장을 이루고 있으므로 완전한 철기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좋은 증거로서 국내에서 10여년 동안 철기의 구술을 글로 옮겨온 소설가 S씨의 말을 빌면 『철기의 구술은 너무 완벽하여 단 한 구절도 손을 댈 곳이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그러면 철기의 장편 소설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는『북극 풍경화』는 어떤 작품인가. 이 작품은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변내부라는 작가가 철기의 구술을 받아 쓴 작품으로 이 작품이 발표된 41년부터 현재까지 장기적으로「히트」, 현재 50여 판이 나와 대만·「홍콩」등지에서 절찬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이 중국어 소설이 국내에 처음 들어오게 된 것은 70년 10월. 당시 송지영씨가「홍콩」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 모씨에게 부탁하여 입수하게 됐는데 송씨 등이 철기에게 국내 번역 출판을 권유, 승낙을 얻어 작년 12월부터 김광주씨가 번역에 착수했다.
철기가 작품을 발표한 무렵 그는 중국 군에 소속돼 있었기 때문에 그의 모든 작품은 가명으로 돼있다고 하는데 이 작품 역시 작자가「무명씨」로 돼있어 작자 문제로 철기에게 의논한 바「이범석 저」로 해도 좋다고 하여 이 작품은 31년만에 주인을 찾게된 셈이다.『북극 풍경화』역시 철기 자신의 체험에 바탕을 둔 것이다. 완전한 사실이면서 어느「픽션」에도 못지 않게 읽는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었던 것은 독립운동 시절 철기의 불타는 조국애와 애절하고도 달곰한「로맨스」가 줄거리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무대는「러시아」의「톰스크」. 때는 1931년 철기가 혈기 방장하던 때의 이야기다. 당시 철기는 중국 마점산 장군 휘하에서 일군에 패해 무장해제 당한 채 8개월 동안 억류돼 있었는데 그 무렵「톰스크」의 어느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오페라」라는「폴란드」여성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당시는「폴란드」도 식민지로서 독일과 소련의 틈바구니에서 억압을 당하던 무렵이기 때문에 이 두 남녀는 각기 조국의 운명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서로의 처지를 동정하며 사랑을 키워 가는 것이다.
철기가 마침내「유럽」으로 떠나게 되어 이들의 사랑은 종말을 고하게 되는데 철기는 이별을 설워하면서 상해 불란서 조계의 한국 임시정부 비밀 연락처로 연락하도록 하나「오페라」는 철기가 떠난지 얼마 후 자살하고 만다.
이「오페라」이야기는 철기 생존시 측근들에게 옛 이야기 삼아 들려주곤 했던 이야기로 유명한데 일설에 의하면 그의 애마「설희」도「오페라」를 생각해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 작품은「스케일」도 크고「스토리」의 전개나 구성이 치밀하게 잘 짜여져 있어 보통 연예 소설과는 차원이 다른 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번역을 담당한 작가 김광주씨의 이야기다.
김씨는『이 소설에서 철기는「러브·이즈·베스트」(사랑은 지고) 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문득 문득「톨스토이」의「부활」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또한 작품의 분위기를 말한다면 철기 자신이 책 서두에서「눈(설)과 고독과 사랑」의 이야기라고 밝혔듯 영국의 규수 작가「에밀리·브론테」의『폭풍의 언덕』과 흡사한 것이라고 한다고
2백자 원고지 1천2백장 가량의 소설『북극 풍경화』는 10월말께 S출판사에 의해 간행될 예정이다.
월간「문학 사상」11월호는 작가 송지영 김광주 송지영, 평론가 김현씨 등으로 하여금 철기 문학의 새로운 정립을 시도하고 있으며 철기 측근과 몇몇 문인들은 철기의 다른 작품도 입수하여 국내에 소개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정규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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