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소·중공 분쟁과 일본의 입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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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중공의 「인민 일보」 「홍기」 「해방 군보」는 어제 10월 1일의 「국경절」을 맞아 3지 공동사설을 발표하고 「닉슨」·전중 과의 두 차례 정상 회담을 중심으로 한 작금의 세계 정세에 관해 자기들의 기본적인 입장과 평가를 밝혔다.
사설은 「닉슨」의 중공 방문이 『20년간의 동결 상태를 깨고 양국간의 우호 관계를 열었다』고 말하고 이를 적극적인 문귀로 찬양했다.
한편 전중의 북경 방문도 『양국간의 전쟁 상태를 종결짓고 일·중 교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식으로 환영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중공 외교의 「승리」는 「아시아」의 긴장을 완화했다고 자찬하기도 했다.
반면 소련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는 놀랄 만큼 가혹하고 적대적인 것이었다.
사설은 『소련 사회 제국주의가 재래의 제국주의보다도 더 기만적이고 위협적인 존재다』 고 규탄한 다음 소련이 『군축을 운위하면서 사실은 군사적인 팽창과 전쟁준비를 추구한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논평은 「닉슨」·전중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구하는데 있어 중공의 주된 전략 목표가 소련의 중공 포위망 구축을 붕괴시키려는데 있었음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이 같은 점은 일·중공 공동성명이 『제3국의 이해에 반하는 것이 아니다』고 말한 것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사실이다.
결국 본인들이 의도했든 안 했든 간에 「닉슨」과 전중은 다같이 중공을 미·일 동맹의 장벽뿐만 아니라 소련의 반 중공 포위망으로부터도 구출해 준 셈이 되었다.
이와 같은 「모스크바」의 판정패는 「키신저」 외교 전략과 모·주 외교 전략의 공통 분모가 낳은 현상이라 하겠다.
즉 미국은 중공을 2정면 작전의 부담과 소련의 포위로부터 풀어주는 대신, 중공은 미국이 『안심하고』 「아시아」개입의 부담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도와준다는 양해가 성립된 거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국제정치의 구조변화의 여파로 자전하기 시작한 일본 역시 중공과의 접근에 의해 그와 비슷한 호혜관계를 맺은 셈이다.
말하자면 일본은 중공을 소련의 포위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대신 중공은 미국의 기업에 대해서보다도 일본 자본주의에 대해 유리한 문호를 열어주기로 한 셈이 되었다.
이렇게 분석할 때 국제정치의 3극화나 4극화는 월남전으로 입증된 미국 세계 전략의 재조정의 필요성 못지 않게 소·중공 분쟁이 또 하나의 필수적인 여건으로 존재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일본이나 미국은 3극 내지 4극의 균형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소·중공이 단일전선을 이루지 않고 항상 적당한 정도의 긴장과 대립을 존속시키는 상태를 필요로 한다는 시각에서 그들의 대 북경·대 「모스크바」정책을 조절할 것이다.
과연 미·일의 중공 접근과 「아시아」에서의 중공 영향력의 증대에 대해 소련은 적잖이 당황한 듯 했으며 일련의 파상적인 「트로이카 외교」를 통해서 대 중공 역공작을 시도함으로써 북경·「모스크바」의 분쟁은 세계 곳곳으로 파급돼 나갔다.
중공과의 접경 부근에 15개 사단의 병력을 집결시키고 「미사일」과 중거리 「로키트」를 배치하는 것 말고도 새로운 비행장을 건설하는 일방 「미사일」전문가 「틀룹코」장군을 극동군 관구 사령관으로 임명했고 신강성 부근엔 새로이 중부 「아시아」관구란 것을 설치해 중공을 사위에서 압박했다.
외교적으로는 「모스크바」-「뉴델리」 주축을 형성하고 「아프가니스탄」과 「뱅글라데쉬」를 끌어들이는 한편 「하노이」와 북경간의 오해를 극대화시키면서 「하노이」관리의 북경 방문, 일본과 몽고의 국교 수립을 주선함으로써 중공의 숨통을 눌러버리려 했다.
그러나 이 같은 「모스크바」의 노력은 일·소 평화 조약에 앞서 일·중공 수교가 재빨리 이루어지고 서독의 「브란트」정권이 정치위기를 맡게됨으로써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되었다.
소련의 중공 봉쇄망은 동서양면에서 동시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셈이다. 동경과 「본」에서 연쇄적으로 터진 구멍을 메워야할 「모스크바」는 또다시 서독과 중공이 금년 10월 안으로 국교를 맺기로 합의함으로써 또 한차례의 고배를 마셔야할 판이다.
이와 같은 소련의 고충을 모를 리 없는 일본은 교묘한 「더블·플레이」로 중공과 소련 사이를 왕래하며 기발한 장사 속을 채우려할지도 모른다.
중공과의 무역·해운·어업 협정을 통해 상품 또는 자본을 수출하는 일방 소련하고도 딴 편으로 「시베리아」유전 개발을 둘러싼 흥정에 열을 올릴 것이 틀림없으며 11월중으로는 일·소 평화조약 체결을 위한 교섭이 시작될 것이다.
전중의 배경 방문으로 일본의 대 소 교섭 입장은 한층 높아질 수밖에 없고 보면 일본은 「평화 조약」을 미끼로 북방 영토 반환 요구를 전보다 훨씬 강경히 내세울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일본은 소·중공 분쟁을 유리한 필요조건으로 적절히 활용하면서 자신의 경제적 이익 추구에 병행해서 정치적 비중도 점차 확대하려 할 것이 분명하며 중증근 통산상이 일·중공·남북한·월맹을 포함하는 「아시아」국 수상 회의를 구상한 발언 역시 바로 그러한 원대한 정치적 구도에 관한 일종의 관측기구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어떻든 모·주 외교는 전중의 귀국 회견(10월 1일)에서 밝혀졌듯이 『군부의 이해를 구하면서』까지 그들이 경계하던 일본과 수교해 『소·중공 조약의 형해화(주의 말)』를 초래 함으로써 「아시아」에서의 일·중공·소의 복잡한 삼각관계를 가동시켜 놓았다.<유근일 기자>
(상)한반도에 미칠 북경 성명 영향.
(중)소·중공 분쟁과 일본의 입김
(하)미·일 동맹과 중공의 입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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